Page 154 - 손홍숙 작가 화집 198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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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작가노트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따뜻한 감동과 위안을 안겨주면서 소통하게 한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해
석과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그림에는 시대의 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언어가 담겨있다. 인간의
언어가 끝난 지점에 그림이 존재한다.
1983년부터 먹물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가 지금은 오일, 아크릴 등으로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을 듣고 있다. 햇살의 포근
함 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 곁에 있어 즐거워지는 그림, 새롭고 행복해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맑은 물과 공기, 형
형색색의 꽃과 풀들, 나무로 촘촘한 산, 펼쳐진 들판, 드높은 하늘 등 대자연 앞에 서면 오만이 사그라진다. 자연은 아름답
고 강인한 힘으로 늘 우리의 삶을 가꾸어 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연과 가까워지려고 오솔길을 둘러보고 들녘을 달려가며 강가를 거닐고 산에 오르기도 한다. 작은 풀과 흙으로 덮인
산기슭을 물감으로 촘촘히 채워보며 나무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산등성이를 칠하다가 눈 덮인 산의 준엄함 앞에서는 머
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그리면서 인생을 느낀다.
은빛 나무줄기를 과시하는 자작나무, 겨울에도 굳세게 서있는 소나무, 누구보다 곧은 대나무와 전나무들은 보기에도 든
든하다. 요염하지만 가시 돋친 장미, 연못 시궁창에서도 피어나는 연꽃, 모진 비바람을 맞고 서있는 야생화, 억새풀, 갈대,
그리고 봄에 푸르던 나뭇잎이 어느덧 갈색으로 변해버린 낙엽들은 정말 아름답다. 마음 닿는 대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
도 않게 그려진 편안한 풍경들은 자연의 조화를 보여준다.
저 아름다운 들판과 산을 장식해 주고 있는 나무들을 그리면서도 숨어버린 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나뭇가지만 그리
고 있는 나, 그 곳에 숨은 빛을 그리고자 오늘도 붓을 잡고 있다. 꽃들도 연못에 비치는 햇빛에 따라 여러 색으로 변한다.
계절이나 시간대 그리고 기후에 따라 빛이 달라지는 자연을 그려보려고 애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자연의 내면 세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2016년부터 동판 캔버스에서 그 세계를 찾아보고 있다. 쇳가루
먼지 속에서도 자연을 탐구해 가는 희열은 다른 무엇에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내게 다가온다. 인간생태계 (human eco-
system)의 의미를 쫓아 자연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고 싶다.
2020 가을
손 홍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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