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원정상 개인전 2025. 12. 3 – 12. 10 KT&G상상마당 춘천갤러리
P. 5
《지층의 기억》은 춘천, 고성, 태백 등 강원도 일대에서 작가가 마주한 다양한 돌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균형을 이루며
쌓인 돌탑, 끊어진 밧줄에 매인 채 자리를 잃은 돌, 절벽의 단면처럼 드러난 지층, 거칠게 균열을 뿜어내는 바위의 표면,
바다와 모래에 의해 부드럽게 감싸인 돌 등 자연 속에서 발견한 돌은 각기 다른 질감과 형태로 존재의 기원을 환기한다.
작가는 또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된 절개지와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드러나는 지층의 단면을 포착함으로써, 우리
가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땅의 시간성과 기억을 다시금 불러낸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문명의 잔해 속
에서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돌은 이처럼 과거의 죽음과 생성이 동시에 응축된 살아 있는 기록물로 다가온다.
카메라는 돌의 표면에 고요히 축적된 시간에 귀 기울인다. 대형 인화로 확장된 화면 속 돌의 균열, 미세한 입자, 윤곽의
흔적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돌이 견뎌온 압력과 지층의 호흡을 시각적 감각으로 환기한다. 사진은 돌의 침묵을 해석
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며, 관객은 이미지 앞에서 자신이 가진 시간 감각과 돌이라는 물질의 심층적 시간이 겹쳐지는
독특한 경험을 마주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을 ‘그것이 존재했음(ça a été)’에 두었다는 점은 이 연작의 해석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사진은 피사체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들이는 매체이며, 서로 도달할 수 없는 두 시간의 층위가
한 장의 이미지 안에서 기묘한 중첩으로 나타난다. 《지층의 기억》 속 돌의 초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하게 작동한다.
돌이 품어온 지구적·우주적 시간, 파괴와 생성의 기억, 그리고 지금 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객의 현재적 시간이 서로를
비추며 교차한다. 사진은 지층에 새겨진 시간에 잠시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매개자이자, 자연의 시간성을 감각적 언어로
재현하는 통로가 된다.
결국 《지층의 기억》은 돌이라는 물질에 퇴적된 시간의 감각을 사진의 표면 위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연작은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 지속과 유한성이 서로의 결을 비추며 사진이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스쳐 지나가는 독특한 시간 미학을
만들어 낸다. 돌 앞에 선 인간은 그 속에 응축된 지구의 깊은 시간과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동시에 체감하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의 층위를 견뎌온, 그리고 앞으로도 견뎌낼 돌의 모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층의 기억을 마주한다는 것은 돌의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자, 그 수억 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여기’에 ‘존재 했음’을 다시 확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