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 전제창 개인전 8. 13 – 8. 18 갤러리이즈
P. 3

표지 : 무위심상(無爲心狀)  94x58cm  캔버스에 먹물  2019


              흘러내려 차츰 식어가면서 여러 지형을 생성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형태와 성질의 암석을 산출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임을 떠올
              리게 된다.

              독특한 기법을 고안하면서 동시에 작가는 그림 틀의 크기나 재질 및 캔버스를 필요에 따라 만들어 사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주된
              캔버스는 아마포이다. 아마포(린넨, linen)는 고대부터 직물 재료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물감이 닿으면 탱탱하게 당겨지는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아마포에 분토나 돌가루를 아교와 섞어 칠한다. 그 위에 먹물을 부은 다음, 마르는 과정에서 캔버스의 뒷면에 투
              과되고 투영된 자연스런 형상들이 빚어낸 모습이 한 폭의 산수풍경이 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세렌디피티로서 미적 즐거움의 자
              연스런 발견인 셈이다. 분갈이 이후 쓸모없는 토분이나 동네 어귀에 버려진 토분을 구해서 그것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사용하는
              과정도 작가에겐 소소한 일상의 재발견인 것이다. 돌가루 묻힌 뒤 아크릴을 바른 다음에 먹물을 입히는 과정을 보며 우연적 요소
              의 개입을 보게 된다. 작가는 여기에 자연스레 선호하는 먹물을 투하하면서 조금 성긴 올의 천에 짙게 베어든 뒷면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뒷면에 여과된 듯 베어든 모습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산수화폭을 이룬다.

              작가는 “흐름이 있어요. 그림이 흘러가는 방향이 있어요. 일부러 늙는 게 아니고 늙어 가는 것처럼 그림도 순리를 따라요. … 내
              삶의 흐름이에요.”라고 진솔하게 말한다. 존재론의 예술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말하듯, 이러한 흐름
              은 시간의 본성에 따라 되어감, 즉 생성이다. 초봄에 씨를 뿌리고 한여름의 성숙을 거쳐 늦가을에 수확하듯이, 시간이 익어감에
              의한 시간의 성숙, 곧 시숙(時熟)의 결과 자연스레 도래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은 시간의 축을 따라 진행되면서 마침내 무
              (無)에 이르는 것이며, 무화(無化)는 시간의 소멸인 것이다. 작업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작가는 먼저 토분이나 돌가루를 반죽해서
              패널이나 천에 바른다. 밑바탕에 비닐을 깔고 문지른 다음, 떼어내면 마치 달표면이나 분화구 같은 면이 생긴다. 여기에 물감이
              나 크레파스로 칠하고 전동 샌더기(electric sander)로 고르지 못한 부분을 갈아낸다. 다시 유화물감을 발라서 긁어내면, 이때 자
              연스러운 능선이 나타나고 여기에 하늘색을 칠해 주면 구름이 머무는 산이 되고 산의 계곡에 물이 흐르게 되며, 때로는 산기슭에
              눈 내린 겨울철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나타난다.

              작가에게 왜 무위심상(無爲心狀)인가? 무위란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나 인위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다. 대체로 ‘억지로 꾸미
              거나 인위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을 자주 언급하는 작가 전제창에겐 무위심상, 즉 무위의 마음상
              태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무위자연은 무위 심상과 동의어이다. 자연 그대로의 마음상태인 것이다. 마음의 상태란 마음의 심경(心
              境)이나 심사(心思), 심정(心情)으로서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다. 한편 상태란 ‘사물이나 현상이 놓여 있는 모양이나
              형편’을 일컫는다. 물리적으로는 자연 현상의 관찰에 의하여 기술된 상황 그대로이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이
              치로서 열역학적인 진행이나 에너지 이동의 결과 빚어진 상태일 것이다. 전제창에게 무위심상의 산수(山水)는 산세나 산의 형상
              을 그대로 묘사하되,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가능한 한 배제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산세(山勢)는 ‘산이 생긴 모양’이다. 그것
              은 포근하고 따뜻할 수도 있으며, 깊거나 얕을 수도 있고, 또는 울퉁불퉁하며 가파르고 험악한 산세도 있지만, 그리 높지 않음에
              도 산세가 험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산세의 물리적 모습 자체와는 달리, 작가는 2004년을 전후로 산세에 대한 마음속의 상념
              혹은 생각, 즉 심상(心想)을 소리와 연관하여 작업하였으며, 2009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심상(心狀)을 무위자연에 근접하여
              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제주의 용암동굴인 만장굴을 탐사하는 중에 천장이나 바위 틈새에서 자라난 종유석을 바라보며 그 미묘한 형상 및 이로
              인한 소리 없는 음향을 마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와도 같은 소리를 듣는 것처럼 독특한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동굴 안
              에서의 울림이 자연음향이 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 것으로 이런 체험을 작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주장한
              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소리를 알아 듣는 청음(聽音)을 넘어, 소리의 깊은 뜻 혹은 속내까지 아는 ‘지음(知音)’의 경지라고 생각된
              다. 작가에겐 마음으로 느꼈던 소리였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소리에 색을 입히고 형상(形狀)에 소리를 더하게 된 것이다.
              기다림과 우연이 개입하여 만든 형상은 정적인 화면에 동적인 시간이 만든 자연스러움이다. 그러는 가운데 작가는 공간 안의 움
              직임에 의해 나타난 형상에서 소리를 듣는다. 색과 소리가 서로 중첩되어 색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색이 된다. 작가 전제창의 자
              연스런 작품 과정에서 보여준 이러한 중첩과 동화(同化)는 무위의 마음상태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김 광 명(숭실대 명예교수, 미학/예술철학)


                                                                                                    3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