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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9월 2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김해일보









                                        -경남정신의 뿌리-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얼마 후 들리기를 김해부사 변국한이 연자루를 중건하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이어서>>>






              이어서>>>                                                                                                제7장

                                                              3) 경세적 실학사상의 원류                                       도읍(都邑)의 정자(亭子)
                                                                                                                    연자루, 함허정, 산해정

              남명은  이  상소문에서  국가는  썩은  고목나무같이
              되어 비바람만 불어도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유학은 '사람에게 필수적인 학문'을 뜻하기도 한다.                                             연자루燕子樓
              국가내부의 부패가 만연하여 외침이 있으면 큰 일                      비록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                            「읍지」  공해조에  “호계(동상동의  호계천)  위에  있
              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종 때부터 다시 여진속이  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 즉 실학일 때| 의의가                                            다.  정사년(1677)에  변국한  부사가  중건하고  정묘년
              발호하고  을묘왜변등으로  왜인들의  동요가  심상치  있다는 것이다.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줄여서                                           (1686)에 이행익 부사가 중수하였으며 무술년(1717)에
              않은 때이고 보니,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있을  쓰는 명칭이다. 그 용어가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                                              김중구 부사가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것을 예고한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바로 이러한 논                     은 《한서》에 '학문을 함에 옛것을 좋아하고, 사실                          맹세형이 시서에 말하기를 "내 일찍이 여러 곳 중에서
              지는 내치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                    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말에서 출발한                           문정공(맹사성)이 지은 김해부의 '연자루' 란 뛰어난 시
              을 약화시켜 밖으로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다. 유학의 실학사상은 경세사상을 구제하는 사상을                                               를 보고 이 루에 오르지 못함이 한이 되어 등불에 비
              풀이할 수 있다. 그 내치의 구체적 부패상에 대해                     말한다.                                                  친 먼지에도 읍하게 되었다. 다행히 피곤한 기운을 향
              서 남명은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충성스럽고 뜻                     남명은 유학사상의 근본 종지라고 할 수 있는 '수기                          막 (군대의 막사)에서 풀고 해진을 모두 밝아 김해부의                     였는데 건물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란
              이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며 부지                     치인에서 치인, 즉 경세적인 실학사상에 학문사상의                           치소에 이르러서 이른바 연재자루 쪽을 바라보니 병화                       소식에 자식으로서 홍복이 아닐 수 없었다.
              런히 애쓰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형                     중점을 두었고 그 제자 및 사숙인들은 이를 계승하                           로 부서진 주춧돌과 잡초가 무성하다.                               마음은 언제나 남쪽으로 달려갔지만 관청의 일로 여가
              세가 이미 극도로 부패해져서 둘러보아 손을 쓸 수  였다. 이것은 유교의 민본적 정치사상과 그대로 통                                                                                                 를 낼 수 없음이 한이었는데, 지난달에 방백(관찰사)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고  어제할  줄을모릅니다.신                 한다.                                                   문미에 걸었던 시판도 불과 연기에 함께 없어졌으니 어                      명이 있어 무거운 책무에서 풀려나 돌아보고 잠자니 행
              은 이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며 계속 탄식하여 낮                     그런데 조선 중기의 시대상황은 남명에게 유학사상                            떻게 유묵(죽은 이의 필적)을 즐겨 구경하며 어디에다                      복하지 않은가.
              에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                     이 올바로 적용된 사회가 아닌 것으로 비쳐졌다.                            갱장  <갱장견요에서  온  말로,  요임금이  죽은  후  순임
              고 허희  하며 탄식하여 밤에는 눈물을 가리는 것                     한편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는 정                           금이 그를 사모하여 3년이 되도록 앉았을 때는 담벽에,                     마음은 빛나는 연자루 난간과 기둥 사이에만 있고 싶은
              이 오래 되었습니다. 자전(문정왕후)은 사려가 깊으                    약용은  16세  때  이익의  글을  접하고  평생  사숙한                    밥을  먹을  때는  국그릇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                데 조물주의 장난인지 날이 저물고 길이 멀어, 올라서
              시나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다. 이익은 그의 부친 이하진과 같은 당색이며 학문                                            다. 선현을 추모하고 사모한다는 뜻으로 사용>의 추모                      조망할  기약도  없네.  심부름을  시켜  시판을  가져오게
              나이가 어리어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드님일  사상과 그 경향성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던 허목을                                                를 하리오. 슬프다! 우리 선조인 신창군의 유풍과 여운                     하여 다시 손질하여 윤색하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다시
              뿐이니, 백천가지 천재와 억만 갈래로 흩어진 인심                     사숙하였다.  허목의  스승은  바로  남명의  고제자인                       이 수백년을 지났어도 매일 부인과 아이들이 지금까지                       새 문미에 걸어 그윽한 연자루의 중건한 뜻에 부합토록
              을 무엇으로 수습할 것입니까?" 라고 죽음을각오하                     정구이다. 허목은 조경과 함께 처음에는 정구의 제                           외우고 말하여 소하지 아니한즉 시가 있고 없음이 진실                      한다." 하였다.
              고 거침 없이 비판하였다.                                  자인 문위에게 사사하다가 문위의 추천으로 정구의                            로 선조의 썩지 않을 공로에 걸여됨이 없으나 뒤에 이
              특히  왕과  대비에  대한  호칭을  '고아'나  '과부'라고  만년 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경세치용의 실학                                     부를 지나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시를 목격하고는 문득                      기록은 연자루가 김해시 동상동의 연화사 일대의 자리
              운운하였지만, 비록 그것이 송대 선인도 사용한 용                     파인 이익과 정약용 등은 바로 남명과 정인홍 그리                           사성의 초헌이 자나친 바요 꽃다운 발자취를 알아 가하                      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와
              어라는 근거에서 하여 '임금에게 불경한 죄로 사형                     고 정구의 학문 경향성과 실학적 요소를 이어 받았                           공경할 제 시 역시 도움되는 바 있으리라.                            시서가 전해지고 있지만, 최초로 언제 누구에 의해 지
              에  처해질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그렇지                다고 볼 수 있다.                                                                                               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열, 김득배, 정몽주 등
              만 왕과 수렴첨정을 하는 대비가 제대로 정치를 잘                     그 구체적인 것은 유학의 학문사상과 그 경향성에                            하물며  나중  볼초  자손으로  역시  공무로  관청의  짧은                고려  후기의  이름난  문신들의  시가  전하고  있어  고려
              못하여 백성이 가죽이 벗겨지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서  주자  성리학에만  머물지  않아,  박학다기하였고,                                          시간을 얻어사불에 느낌 포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경                      때의 누각임을 알 수 있다. 주 열이 1287년에 세상을
              왕이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왕답지 못하였으니 남                      사회경제적 문제의식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                            해 윗사람에게 자기를 알리는 기침소리)를 책상 앞에서                      떠났으니 적어도 그 이전 누각임은 확실하다.
              명이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타당하다.                       된 남명학파 인물들의 공통적인 '서리망국론과 이익                           받은 즉, 어찌 가히 뜻하는 한 하디 말이 없겠느냐? 마                    「읍지」의 연혁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타 무너져 내
              이러한 상소문을 올릴 수 밖에 없는 당시 사회·정                     의 '장리론'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은 그 대표적인                        침내 부사 조 즙과 아울러 5대 백조 신창군이 지은 운                     린 것을 정사년(1676)에 중건했고 정묘년(1686)과 무
              치적  현실의  구체적  모습은  남명은  〈민암부>에서                 예이다. 남명은 "군정, 민정 등 서정과 나라의 기무                         에 탁하여 다시 새겨 별관에 매달고 인하여 거칠고 못                      술년(1717)에 중수했다. 오랜 세월에 무너져 내리고 훼
              도 이렇게 옮고 있다. "궁실을 광대 하게하는 것은  가 모두 도필의 손에서 나오니, 한 타래의 실, 한                                            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왼쪽에 써노라."하였다.                        손됐다가 1932년 9월 완전 철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
              암을 운반해 오는 수레이고 여알(:왕의 총애를 입                     톨의 밤도 서리들 손에 맡겨서 바치지 않으면 시행                                                                              다.
              은 궁녀가그 권세를 이용하여 청탁하는 행위)이 성                     되지 않습니다. 안으로 재물은 모일지 몰라도 밖으                           맹주서가  시서에  이르기를  "옛날에  내  선군(돌아가신
              행하는 것은 암의 계단이고, 세를 거두는 데 기준이  로 민중은 흩어져 열 사람에 한 사람이 남아 있기                                             아버지 맹세형)께서 항상 영남 김해부에 연자루가 있었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문신들이 남긴 '연자루' 시 속에
              없음은 암을 쌓는 것이고, 사치함이 헤아릴 수 없음                    가 어렵습니다.                                              다고 말씀하시며 '선조 문정공(맹사성)께서 일찍이 시                      서 아름다운 어제의 김해를 오늘에 그려본다.
              은 암초가크게 서있는것이니 이 암초가 비록 민중                                                                            한 편을 연자루에 남겼으나 누각이 임진왜란에 불타고
              에게 연유하고 있으나 임금의 덕에서 더 크게 연유                                                                           옛 터만 남아 있었다. 정묘년(1627) 말을 타고 김해부
              함이 아닐 수 없다. 물과 같은 박성이 배인 임금을
              받들어 모시지만 물 속에 암초인 바위가 있으면 배                    다음호계속>>>                                               에 가서 그 시의 제를 이어 다시 새겨 별관에 걸었다.'
              는 좌초해서 전복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당시                                                                           고 하셨다.
              현실이  온통  바위를  물  속에  운반하여  크게  쌓고                                                                                                                        다음호계속>>>
              있는 것과 같아, 잘못하면 왕 자신도 무너지게 된다                                                                          못난  자식은  입으로  대답하고  마음속에  아름답게  새
                                                                                                                    겨 마음을 다해 김해부로 가서 감상하려 하였는데 전쟁
              는 엄청난 경고이다.                                                                     김해일보                  이 계속되고 세월이 덧없이 흘러 45년이 지났다. 지난
              이것은 남명이 진리란 정사에 있으며 정치의 근본이                                                                           해 가을에 화산(경북영천) 수령으로 나갔으나 땅은 비
              란 바로 민중에게 있다는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록 같은 경상도지만 길이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서 이룰
                                                                                                                    수가 없었다.                                                                                김해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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