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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이야기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11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연자루(燕子樓) - 조 심曺深
金陵佳麗古王州 금릉가려고왕주
遺跡盆臺風虛樓 유적분대여연루
逆旅無人勤嗣 역려무인근근사
이어서>>> 그리고 고리처럼 이어지는 절벽은 갈래지다 합쳐고 百年禎廢舊城 백년퇴폐구성두
청학의 그림자가 비치는 학연은 그 바닥이 보이지
層樓高出海雲中 층루고출해운중
않는다. 여기서 남천지창조의 신비감 속에 휩싸였다. 畵棟樑映日紅 화동조량영일홍
나주로 가기 직전 남명은 오늘날 광주시 광산구(光山 燕子亦應興廢感 연자역응흥폐감 橫江白露水 횡강백로겸가수
區) 신창(新昌) 2동에 그는 풍영정(風亭)에 들렸다. ‘바람과 천둥이 뒤얽혀 서로 싸우하늘과 땅이 열리는 雙雙飛舞語微風 쌍쌍비무어미풍 滿野荒雲豫秋 만야황운가색추
풍영정은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의 언덕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라고 하면서 거기서 主聖世平民樂業 주성세평민락업
위에 세워진 정자로 1560년 칠계(漆溪) 김언거(金 한 천지창조의 변전(變轉)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益傳終夕盛風流 배준종석성풍류 官閒日滅上眉愁 관한일감상미수
彦琚)에 의해 세위진 것이다. 이 곳은 나주로 가는 不是君侯樂勝遊 부시군후낙승유
길목에 있어 되게 이황(李滉)이나 하서 김인후 (金 남명은 또한 어느 시대-새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끼 辛苦一春經始意 신고일춘경시의 약관에 꿈처럼 금주를 지났는데,
麟厚), 석천 임억령(林億), 제봉 고경명(高敬命) 등 낀 바위에서 ‘삼신동(三神洞)이라는 글짜를 발 億年王國以寧새 억년왕국이녕휴 백발 되어 다시 연자루에 왔네.
많은 선비들이 들러 노닐 던 곳이다. 남명 역시 이곳에 견한다. 삼신은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염두에 대지는 산의 사면이 둘렀고
와서 정자 아래 연못에 피어 있는 국화를 보면서 < 아름다운 금릉(김해)은 옛 왕의 고을 끝없는 하늘은 밝은 조선의 머리다.
영련(詠蓮)> 이라는 두 수의 시를 남긴다. 남명은 둔 표현이고, 이것이 여기에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 남긴 자취 분성대와 연자루다.
이 작품에서 연꽃 이 묵묵히 뻘 속에 있을지라도, 곳이 바로 방장산 가운데서도 신선이 사는 청학동임을 나그네 뿐이라 부지런히 지붕 이는 사람 없어 백로는 강을 건너 물가 갈대밭에 앉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빛나는 것과는 다르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퇴폐한 옛 성은 머리만 남았네. 크기 구름 가득한 들판은 가을 벼농사라.
강조하면서도 진흙 속에 어울려 살아 유하혜(柳下 법이 성스러워 세상 태평하니 백성은 일이 즐겁고
惠)의 기풍이 있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다. 여기서 신선이 사는 초월의 세계 청학동은 수많은 질곡이 층층 높은 누각은 구름바다 속으로 솟았고 필리업무 날마다 한가하여 임금의 근심을 던다.
우리는 남명이 연꽃을 바라보면서 산림에 문혀 수양을 있는 현실세계와 관련하 여 어떤 의미를 지닌 그림 아로새겨진 기둥과 들보는 햇빛에 붉다.
거듭하여 ‘덕의 향기를 뿜어내는 처사를 생각하면서도 것일까? 부조리로 얼룩진 현실과 사절하고 자신의 제비도 흥망의 기운을 아는지 작가 허 전은 정조 21년(1797)~고종 23년(1886)의 인
유하해처럼 진 홀으로 상징되는 현실을 잊지 않아야 쌍쌍으로 날며 산들바람에 재잘 거리네. 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다. 호는 성재, 1835년 39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적 정신적 초월만 강조되는 이 신선의 세계는 과연 세 때 별시문과의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오르고
남명의 국토순례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가장 정당한 것인가? 남명은 청학 돌에서 여기에 대하여 술잔과 술동이에 종일 풍류를 담아 1855년 우부승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4년 김해부
본격적이면서도 조직력으로 진행되었다. 일찍이 남명 고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고민을 남명은 제후는 아니지만 더 없이 즐겁다. 사로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
도를 크게 일으켰다.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지리산을 “덕산동으로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는 7언절구에 고스란히 고난 겪으며 봄을 보낸 뜻은 1866년 7월 15일 김해부사를 이임하고 숭록대부가 되
오래도록 왕국이 편히 쉬기를 바라서라네.
간 것이 세 번이었고, 청학동과 신응동으로 들어 담아두었다. 었다.
간 것이 세 번이었고, 용유동으로 들어 간 것이 세 작가 조 심은 1763~1803년의 김해 출신 인물로 자는 훌륭한 문신으로서 임금께 강연까지 한 큰 정치인이자
번이었으며, 백운동으로 들어 간 것이 한 번이었고, 한 마리 학 구름위로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고, 경원(景源)이다.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 지방 관리로서는 작은 마을의 예법까지 지도한 큰 스
지 않고 녹산(蒙山)에 범방대를 쌓아 은거했다.
장항동으로 들어 간 것이 한 번이었다. 이렇게 보면 獨鶴穿雲歸上界 승이기도 했다. 김해 부사로 부임해서 관리로서의 직무
지리산 유람록을 쓸 당시를 포함하여 모두 열 두 번 옥같은 시내 한 줄기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연자루(燕子樓) - 임익상任翼常 를 잘 수행한 것은 물론이고 고장의 역사를 바르게 하
고 고장의 문화를 노래하고 후세에 까지 전한 허 전 작
이상을 유람한 것이 된다. 그 이유를 남명은 지리산 一溪流玉走人間 西遊遠客又南州 서유원개우남주 가께 필자는 “감사합니다”인사를 올린다.
의 한 쪽 모퉁이를 빌어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누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 逆旅乾坤獨倚樓 역려건곤독기루
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장대한 국토산하를 從知無累翻爲累 虛艦枯荷浮水面 허함고하부방면 연자루 - 정현석顯奭
마음으로 느끼며 거대한 기개를 기르기 위함 이었을 마음으로 신하를 느끼고는 보지 않았다고 하네. 陵寢草近城 납릉쇠초근성두 江南佳麗說金州 강남가려설금주
것이다. 이처럼 지리산을 중심으로 우리 국토에 대한 心地山河語不看 黃蘆曠野荒荒日 황로광이황황일 表帶逍遙晩倚樓 구대소요만기루
무한한 애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 순례에 대한 기록인 翠竹孤村萌萌秋 취죽고촌염염주 三月東風回燕子 삼월동풍회연자
二陵芳草沒龜頭 이릉방초몰구두
曺將軍君莫笑 개주장군군막소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남명은 하늘과 현실의 매개자로 書生亦足擇邊愁 서생역족한변수
남명은 58세 되던 해 첫 여름 진주목사 김홍(金泓), 청학동을 제시하고 초월 공간 인 이곳을 들어 오히려 滿城花氣如酒 만성화기훈여주
수재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 이희안(李希顔). 세속적 현실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역설적 서쪽에 노닐던 멀리서 온 객이 다시 남쪽에 와서 近海天光爭似秋 근해천광쟁사추
但願年豊民共樂 단원연풍민공락
청주목사 이정(李楨)과 함께 지리산을 순례하였다.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1구에서는 청학동에서 하늘과 땅 사이 나그네로 누각에 기댄다. 四時歌管更何愁 사시가관갱하수
난간은 비어 있고 마른 연잎은 얼음 위에 떠 있는데
구암(龜巖) 이정은 사천에서 나서 과거에 장원급제한 학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고, 2구에서는 청학동에서 납릉 머리의 시든 풀 성머리에 가깝구나,
인물로 퇴계의 문하에 출일하면서 남명과 교분이 구슬같은 한 가닥 시냇물이 인간 세상으로 흐른다고 남쪽의 아름다움은 금주를 말함이니
갑옷에 띠 두르고 거닐다 늦게 누각에 기댄다.
깊었다. 뒤에 남명이 덕산에 정착하였을 때 이정도 그 했다. 청학동은 학을 통해 하늘과 연결되고 물을 누른 갈대 빈 들녘 햇빛 거친 날에 3월 봄바람에 제비 돌아오니
푸른 대나무 외로운 마을에 가을은 흘러가네.
옆에 와서 함께 살기로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후 다른 통해 인간 세상과 이어진다 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갑옷 입은 장군들 웃지를 마소 두 능의 꽃다운 풀밭은 구지봉에 잠긴다.
일로 인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 여행은 여기서 남명이 하늘과 연결되는 ‘학을 중시하는가, 서생(부사)도 변방의 근심 막는데 최선을 다한다오. 성 안 가득한 꽃향기에 취함이 술에 취한 것 같고
1558년 4월 10일 삼가의 뇌룡사(雷龍舍)를 출발하여 인 간 세상으로 이어지는 ‘물을 중시하는가가 작가 임익상은 1852년 9월 7일 김해부사로 도임했다가 바다 가까운 하늘 빛 맑기가 가을 하늘 같다.
진주를 거쳐 사천을 지나 남해바다와 섬진강, 그리고 문제이다. 남명은 후자를 선택했다. 1854년 4월 2일 상경한 후 내려오지 않았다. 이 시는 오직 원하니 해마다 풍년 들어 백성과 즐기면
쌍계사 와 불일암, 청학동, 신응사, 삼가식현, 옥종의 에서 세상의 ‘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사로 재임할 당시 어느 늦은 가을날 연자루에서 지은 일 년 내 노래한들 그 무엇을 근심하리.
칠송정 등을 거쳐 4월 25일 다 시 뇌룡사로 돌아왔으니 남명이 일찍이 세상을 살아가자면세상의 얽매임이 것으로 느낄 수 있다.
16일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명은 실제로 있었던 일 없을 수 없다고 한 생각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연자루(燕子樓) - 허 전許傳 다음호계속>>>
을 객관적 시각에서 서술하기도 하고, 놓칠 수 없는 논리이다.
如夢過金州 약관여몽과금주
자연경관을 정서적 감흥 에 실어 세밀하게 묘사하기도 이상과 같이 남명은 국토산하에 대한 독특한 인식에 華髮重來燕子樓 화발중래연자루
하였다. 또한 선인들의 유적을 만나면 거기에 따라 기반하여 여러 갈래로 대의 길을 나섰다. 자신이 大地過遭山四面 대지주조산사면 김해일보
일정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남명은 국토산하에 살던 곳을 중심으로 인근의 고을은 말할 것도 없 長天軒齡海東頭 장천헌활해동두
대한 신비감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도 지방으로 길을 걸으며 경주에서 패망한 신라의
따순밥/권덕진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나 지방으로 길을 떠나
바위 묏뿌리가 공중에 달린 듯 드리워져 굽어 볼 수가 연꽃을 중심으로 처사적 기품과 현실에 밀착되어
없었다. 동쪽에 높고 파르게 버티고 돌출하여 조금도 있는 식을 보였다. 특히 지리산은 남명 국토순례의
서로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이고, 서쪽 푸른 주 대상이었다. 여기서도 지리산의 아름다움 자체에
벼랑을 깎아 내어서 만 길 벽처럼 선 것은 비로봉이다. 매몰될 수는 없었다. 곤고한 백성들이 그의 의식에서 사는 것이 마음처럼 ◆권 덕진 프로필◆
술술 풀리지 않을 때면
청학 두 세 다 가 바위 틈에 깃들어 가끔 날아 나와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이 가마솥에 갓 지은 따순밥을 먹고 싶다 제1회 쌍매당 이첨 문학상 대상 수상
선진문학 기획 국장
하늘을 빙빙 돌다가 내려온다. 그 말 학연(鶴淵)이 모두 두류산 한 복판에 있어 푸른 고개가 하늘에 저서 시집 시의 사계 1.2권
있어 컴컴하게 어두우며, 바닥이 깊다. 좌우 상하에 꽂힌 듯하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하니 오는 사 김이 모락모락 오른
부뚜막에 웅크리고 앉아
절벽이 교 처럼 둘러 있고 층층으로 된 위에 한 층이 람드물겠으나 오히려 관가의 부역은 없지 않아서 밥 한술에 묵은 지 얹어
더 있어 문득 돌다가 합치기도 다. 그 위에는 초목이 양식을 쌓고 무리를 모아 서 가고 오는 자가 잇달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다
우거져서 다부룩한데 고기와 새들도 또한 지나다니지 모두 흩어지기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정사가 번게 삶이 힘겹고 ◐시 평/시인 박선해◑ 떼운다.
하고게다가 아득하게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바람과 롭고 부역이 무거워 백성이 끝내 떠돌아 없어지고 뜻대로 오지 않을 때면 시골 가마솥의 풍경, 정겨운 애착이 시골 삶이란 그 광경이 일상이다.
천둥이 뒤열혀 서도 다우니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는 아비와 자식이 서로 보정하 지 못한다고 한탄하였던 종일 아랫목에 품어주던 그려진다. 가마솥 밥 내음은 가슴 가마솥 밥 짓는 장작에 마음 대어
진하게 물들여 오는 그리움이다. 솔
본다.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클과 바위를 것이다. 남명의 국토순례 과정에서는 이같은 생각이 따끈따끈한 고봉밥을 꺼내고 싶다 솔 김 오르는 옛 시절을 잠시 떠올 시절의 그때를 떠올려 보니 시인에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관되게 흐르고 있음이 발견된다. 세상살이 가슴 아플 때 린다. 뭉툭했을 그리움이 가슴에 스민다.
슬픈 인연에 주저앉고 싶을 때 특별한 찬 없이 단출한 묵은지의 시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던 모정
주린 마음 데워주었던 골 밥상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 있었겠다. 때때로 그 따순밥은
이 글은 청학동에 대한 묘사이다. 청학동의 바위는 다음호계속>>> 따순밥을 먹고 싶다 따순밥의 그 시절이 코끝으로 든다. 다시 없겠지만 딱히 정해진 것 없는
하늘에 매달린 듯하고 동쪽으로는 향로봉이, 가끔 삶이 힘들고 사는 게 마음처럼 세속에 지친 위로다. 희노애락의 따
서쪽으로는 비로봉이 만길 낭떠러지로 솟아 있었다고 시커멓게 손때 묻어 쉽게 풀리지 않을 때가 있지 않은 순밥이 떠억하니 눈앞이다. 미소 가
가. 군불 오른 부뚜막을 떠올리면
득 피운 한상이 시인에게 차려지는
했다. 청학 두 세 마리가 바위 틈에 살면서 하늘을 김해일보 낡은 밥주걱에 한 움큼 퍼주던 왠지 노곤한 아궁이의 불잉걸이 떠 상상을 드린다.
모정을 먹고 싶다.
오르내리며 이 곳이 바로 청학동임을 알려 주었다. 오른다. 인연 줄에 걸터앉아 군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