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메타코칭 공토 어드밴스 스타트 해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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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코칭 인지훈련 어드밴스 스타트 해설지
인지기억 - 바른 자세로 몰입하여 읽는다
- 중심 단어 5개로 문장을 연결하여 내용을 줄거리를 만든다.
명량대첩
명량대첩은 1597년(선조 30년)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싸움이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군과 싸웠으나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대패하게 되어 해
상권이 왜의 수군에게 돌아가게 되자 긴급해진 조정은 그 해 7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는 전력은 전선 12척과 수군 120명 뿐이었
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일반백성이 가져온 배1척을 추가한 13척의 함선을 정비하여
명량해협으로 출전한다. 명량은 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9월 16일 새벽 왜의 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일자진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지자의 총통을 쏘면서 공격했다. 군사력은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
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 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 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
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했고, 나머지 적선은 달아났다. 이 승리
로 우리나라는 다시 재해권을 갖게 되어 왜병의 활동을 저지시켰다.
명량대첩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
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은 세계 해전사의 전무
후무1)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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