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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오늘의                                                                                        사순 제3주일
           은총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신앙을 기억하고 따라가기
           말씀

                     땀의 증거자2 - ‘사제직을 향한 칠천 리’





                                                               제품을 받습니다.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탐색하는
                                                               중에 김대건 부제는 중국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당에서 먼저 사제품을 받았고, 페레올 주교와 함
                          처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께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병오박해 때 체포되어
                   제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1846년 9월 16일에 군무효수형으로 순교합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동료를 잃은 비통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최양업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지극히
                                                               부제는 소신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1846년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초부터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귀국길을 탐색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였고,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수여 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                 여 교황청에 보냅니다.
                       제가 주어진 것은 과분한 것입니다.                       1849년 4월 15일 상해 장가루(张家楼) 성당에
                   미사 중에 하느님 앞에서 모든 신부님들과 저의                   서 최양업 신부님은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
                  동료들을 더 자주 더 열렬히 기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헌합니다. 이후 중국 요동 차쿠(岔溝)에서 베르뇌

                                                               신부님의 아래에서 첫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중국
                                                               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
                      상해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보낸
                                                               가 됩니다.
                        여섯 번째 서한 (1849년 5월 12일)
                                                                 1849년 12월 말, 최양업 신부님은 총 여섯 차

            1844년 12월 10일경, 신학생 최양업(토마스)                       례의 입국로 탐색 여행 끝에, 조국을 떠난 지 13년
          과 김대건(안드레아)은 만주 소팔가자 성당에서                            만에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제3대 조선대목구장)에게 함께 부                           교구 복음화사목국



             ӒܻझبҮ ࢚૚             14. 종려나무                     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교 성인의 모습은 종려
               ثࠁӝ
                                  고대부터 종려나무는 승                 나무와 함께 묘사되곤 한다.
                                리의 상징이었다. 전쟁에서                   종려나무는 또한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로 간주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                            되기도 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성모님께 예수님

          들었고, 운동 경기의 우승자에게도 종려나무 가지                           의 잉태를 알릴 때나, 성모님의 임종을 예고할 때
          를 건넸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이러한 상징적 의                           의 그림에서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타난다.
          미를 받아들여 종려나무를 죄와 죽음에 대한 승
          리,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호
          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요한 12,13)라고 외쳤고, 이때 손에 들고 흔든 종려
                                                                                                    피에트로 로렌제티,
          나무 가지는 예수님의 순교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1315-19년경,
          예표이다. 종려나무의 의미인 죽음에 대한 승리는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성당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표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 · 인천가톨릭대학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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