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노재순 작가 e-작품집
P. 5
복잡다단한 현실에 대한 은유적인 메시지
신항섭(미술평론가)
화가는 누구나 자기만의 조형세계, 즉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극히 적은 작가들만이 이 목표
를 성취할 뿐이다. 그만큼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통한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은 힘들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누구도
가본 일이 없는 조형세계를 강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럼에도 화가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탐색하고 아이디어
를 찾아 나선다. 개별적인 형식미를 완결하지 않고는작품의 영원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에 그렇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자세로 새로
운 소재를찾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어내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이유이다.
노재순은 지난 10여 년 동안 입술이라는 소재로 작업해왔다. 원색적인 입술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그를 에워싼 배경은 무채색의 무
겁고 어두운 이미지들이 포진한다. 이처럼 상반 되는 색채 이미지로 인해 어느 곳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원색적인 립스틱
으로 꾸민 입술이 화면을 장악함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림의 전체상이나 의미를 읽어내기 이전에 시각적으로 압도당하는 것
이다.
그가 신체의 일부인 입술을 소재로 채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 모른다. 대학 졸업 후 한 때 현대미학에 심취해 눈(眼)을
소재로 하여 작업한 일이 있었다. 눈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시각적인 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창’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내면세계
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처럼 인체의 특정 부분에 관심을 가진 전력이 동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입술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업은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형식미를 가지고 있다. 입술의 이미지가 화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비
구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비교적 간명한 작업이다. 이러한 패턴이 형식화하여 작품마다 반복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로 복잡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화면을 압도할 만큼 존재감이 큰 입술에 비해 그 외연, 즉 입술을 에워싸고 있는
배경은 매우 복잡하고 난삽해 보이는 이미지들로 채워져 사뭇 어지러울 지경이다. 포스터를 뜯어낸 자국인 듯, 찢어지고 조각난 종이
조각들과 낙서 그리고 오랜 시간의 축적을 말해주는 비바람에 얼룩진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오래된 시간의 축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낡은 벽면의 이미지에 다양한 색깔의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대비시키는 구성은 창의적이고 독특하다.
소재도 그러하거니와 입술과 배경의 대비라는 구성상의 특징이 그러하다. 입술이라는 소재는 시각적인 자극이 매우 강하다. 입술은
여러 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눈에 보이는 자극 이상의 심리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에로틱한 성적인
상상력을 부추긴다.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며 관능적인 입술의 이미지와 마주하는 순간 심리적인 동요를 피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