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2023서울고 기념문집fo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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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들 중 몇 명은 떠밀려 문예반으로 들어왔고,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리타분하게 詩나 읽고, 文學을 논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혈기왕성했다.
또한 머릿속에서 인생 그림을 그리기에는 그리 치밀하지 못한 나이였다.
물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위대한 문인들이 10대 때부터 詩나 소설(小說)을
쓰기도 했지만, 나 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방에 들렸다.
동아리방에 놓여있던 철재 캐비닛 문 안쪽에 하늘같이 위대해 보이던 2학년
선배들의 이름이 검은 매직으로 쓰여 있었다.
"여기 2학년들 이름은 누가 쓴 거냐?"
" 2학년 선배 중에 누군가 썼겠지!"
"그럼 우리도 2학년과 동등한 문예반 멤버이니 족보에 올려야 되지 않겠냐?"
온몸의 정기를 손 끝에 모아 일필휘지(一筆揮之) 왕희지체로, 문예반 1학년
구성원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캐비닛 문 안쪽에 적어 넣었다.
천재는 악필이라 했던가...
내가 써놓고도 초등생 칠판 글씨처럼 삐뚤빼뚤한 것이 영 보기가 안 좋았지
만, 다시 지우는 방법도 마땅치 않아 그대로 캐비닛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까맣
게 잊어버렸다.
일주일 후 문예반 동아리에 들러 동아리방 문을 여는 순간 심상치 않게 무겁
게 가라앉은 공기가 내 얼굴을 휘감았다. 2학년 선배 중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깡마른 체구의 신경질적으로 생긴 인간이 하나 있었다.
"어떤 새끼가 여기다 낙서했어?" 바로 내가 일주일 전에 들여다보던 캐비닛
을 열어놓고 까만 안경태가 하는 말이다.
동아리 방에 먼저 와 있던 동기 서너 명이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죄인처
럼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없이 기둥같이 서 있기만 했다. 비록 글씨가 맘에 안
든다 해도...
'지들은 이름이고, 우리 이름은 낙서인가...'
'새끼'라는 단어도 귀에 거슬렸지만, 특히 '낙서'라는 단어에서 1학년과 2학년
을 차별하는 것처럼 들려 나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제가 했습니다!"
24 _ 서울고 35회 졸업 40주년 기념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