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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임시직이었던 독성장에게 군사를 통솔하는 실직이 부여되고, 군기와 함께 화약도 충분 갖추어
                  지면서 산성으로서 방어시설은 물론 부민들의 거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3. 병자호란과 오산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아물기도 전에 조선은 다시 청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왜란 이후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수원부 역시 전쟁의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용인과 시흥에 연접하

                  고 있던 수원부의 광교산 일대는 호란이 한창인 당시 전략적 요충지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 일대는

                  비록 왜란에서 패전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병자호란에서는 조선군의 연전연패가 계속되는 상황
                  에서 승전을 올리고 있었다.        48)
                    당시 광교산 전투의 승리는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 1585~1641)이 주축이 되었다. 김준용은 인조

                  때 무신으로 인조 14년(1636) 기보우방어사(畿輔右防禦使)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병자

                  호란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병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
                  을 이끌고 근왕병을 모집하여 직산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현재 평택과 오산 일대를 거쳐 광교산에 진
                  을 설치하고 적과 대치하였다. 남한산성을 향하던 대부분의 근왕병은 패배하였지만, 김준용이 이끄

                  는 호남병만이 남한산성 가까이에서 승전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김준용은 몸놀림이 빠른 군사를 뽑

                  아 청군의 유격기병(遊擊騎兵)을 격파하였다. 치열한 결전을 벌인 결과 당시 청군에서도 전공과 신망
                  이 높은 지휘관인 태종의 사위인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가 전사하였다. 적장은 물론 사상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조선군의 사상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군대

                  내의 도망자와 이탈자가 증가하였고 김준용은 주위 인물들에 의해 무고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정조 15년(1791)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임진년과 병자년 때 공을 세운 창의사(倡義使) 우성전
                                                                              49)
                  (禹性傳)과 병사(兵使) 김준용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 이듬해 9월에 김준
                                                       50)
                  용에게 충양(忠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광교산 기슭의 바위에 ‘충양공김준용전승지 병자
                  청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 살청삼대장 (忠襄公 金俊龍 戰勝地 丙子淸亂公提湖南兵 謹王至此 殺淸三大

                  將)’이라는 글을 새기고 그의 전승을 기리도록 하였다.               51)
                    또한 오산의 서동에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하던 중 전사한 충신 이상재(李尙載,
                  1607~1636)의 정려각(旌閭閣)이 남아 있다. 그는 인조 8년(1630) 진사가 되고, 인조 11년(163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랐으며 인조 14년(1636)에는 금정도찰방(金井
      오산시사        道察訪)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으로





      제
      2
      권           48)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27쪽.
                  49) 『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1월 22일(정유).
                  50) 『정조실록』 권35, 정조 16년 9월 29일(을축).

    144           51)  수원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 성역 당시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이 김준용의 승전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당시 수원유수 채제공이 듣게 되고 그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채제공에 의해 바위에 글이 새겨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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