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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조성하지 않았다. 정조는 ‘연운(年運)’, ‘산운(山運)’, ‘원소본명운(園所本命運)’ 등 모든 기운이 최 147
고조에 달한다는 기유년(己酉年, 1789)에 아버지의 무덤을 길지(吉地)로 옮기기 위해 사전 작업을 추 역사
진하였다. / 유적
마침내 정조 13년(1789) 7월 11일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 1725~1790)이 영우
원의 열악한 실태를 보고하며 이장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우원의 풍수적 문제점들과 정자각(丁 · 유물
字閣)의 치미(鴟尾)에서 뱀이 발견되어 사도세자 봉분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상소
를 받자마자 정조는 즉시 전·현직 대신들과 종친들을 불러 박명원의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은 종묘
(宗廟)와 사직(社稷)을 보호하는 계책이라며 찬성의 뜻을 밝혔다. 정조는 그날 그 자리에서 영우원의
이장과 함께 새로운 무덤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수원부의 읍치자리를 신원소의 위치로 결정하였다.
영우원 이장은 단순히 박명원의 상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조의 치밀한 준비와 계획이 선행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무덤 자리는 일찍이 효종(孝宗)의 능지로 추천되었던 수원 화산 기슭의 옛 수원 읍치로 결
정되었다. 화산(花山)이라는 이름처럼 팔백 개의 연꽃잎이 둘러싼 형국, 또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
는 형국의 천하 명당이 새로운 무덤 자리로 결정되었다.
영우원의 이장과 새로운 무덤의 위치가 결정되자마자 조정에서는 바로 천원도감(遷園都監)과 원소
도감(園所都監)이 구성되었다. 천원도감은 무덤의 이장을 주관하는 부서였고, 원소도감은 새로운 무
덤을 조성하는 부서로 도감(都監)은 국가적인 토목공사나 의례행사 등에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였다.
임시기구가 조직되자 바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을 경기관
찰사, 조심태(趙心泰, 1740〜1799)를 수원부사에 임명하였다. 총호사 및 천원도감과 원소도감의 도
제조에 영의정 김익(金熤, 1723〜1790), 천원도감 제조에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재간(李在
簡, 1733〜1789)·정창순(鄭昌順, 1727〜?), 원소도감 제조에 김이소(金履素, 1735~1798)·정민시
(鄭民始, 1745~1800)·이문원(李文源, 1740~1794)이 등용되어 영우원 천장이라는 대역사를 착수하
였다.
신원소 조성이 결정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의정 김익 등의 신료들은 새로운 원
소 자리를 살피기 위해 수원을 다녀오고, 천장할 날짜를 택일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영우원 천장에 필요한 비용 마련을 위한 구체적 방안도 마련하였다. 천장할 산세를 살피러 오
고가는 도감(都監)에게는 말을 내려주고, 전례에 따라 인부와 장인(匠人)에게 지급하는 급료[糧料]는
이전에 비해 2배로 내려 주도록 하였다. 이외에 추가로 필요한 비용은 영문(營門)에서 경기감영으로
1만 냥을 내려보내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천봉에 필요한 자세한 내용은 세종의 영릉(寧陵)과 인조
부친 원종(元宗)의 장릉(章陵)을 천장하였던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기준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현륭원은 홍살문(紅箭門)을 비롯한 봉분과 석물 그리고 주요 건물들이 7월 20일부터 10월 16일까
지 단 3개월 만에 공역이 마무리되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하며 국가적 지원은 물론 최고의 장인
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현륭원이 들어선 자리는 옛 수원부 읍치로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
다.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당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재사용하였는데, 재실(齋室)은 수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