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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 형태를 취하며 일반적으로 집자리 중앙부에 위치한다. 패총, 즉 조개더미 유적은 남해안에서는 21
덧무늬토기 단계에, 서해안에서는 빗살무늬토기 단계에 등장하지만, 그 수가 급증하는 것은 후기에 역사
들어서다. 서해안 패총 대부분과 일부 남해안 패총은 소규모로서 거의 전적으로 굴껍질로 구성되어 / 유적
있으며 유물도 극히 드물다. 이러한 유적은 정주 마을과는 그 기능적 성격이 다른 유적으로서, 소위
한정행위장소 혹은 일시적 거주 지점이라 부를 수 있는 단기 사용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에 · 유물
비해 대부분의 남해안 패총은 규모도 크며, 패각층에는 각종 유물과 사슴이나 멧돼지, 어류를 비롯한
동물 유체가 다량 포함되어 있고 때로는 집자리와 무덤, 야외 화덕도 발견되고 있어,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된 생활 근거지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인들은 주로 채집과 수렵·어로를 통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농경의 비중은 높지 않았던 것
으로 파악되고 있다. 육지에서는 도토리·가래·밤과 같은 나무 열매나 풀뿌리 등을 채집하였으며,
멧돼지·사슴·고라니·야생비둘기·까마귀·독수리 등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을 잡아먹었
고, 강이나 바다에서는 굴·소라와 같은 조개를 비롯하여 각종 물고기, 심지어 복어나 고래, 상어도
식용되었다. 이 시대의 농경활동의 증거는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조와 기장과 같은 탄화곡물(炭
化穀物), 그리고 밭을 가는 굴지구(掘地具)인 보습이나 수확구인 낫 등의 발굴조사 양상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부산 동삼동 패총의 기원전 5,000년경의 덧무늬토기 표면에서 기장의 압흔(壓痕)
이 검출되어 농경의 시작을 더 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2년도에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랑과 고랑을 갖춘 신석기시대 밭을 발굴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이 밭이 신석기시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고, 고고학계의
쟁점이 되었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인접 지역과 교류한 증거도 드러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일본의
죠몽토기와 흑요석이 나왔고, 반대로 일본의 큐슈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결합식낚시바늘, 그리고 조
개팔찌 등 남해안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물건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양 지역의 교류
에는 배가 이용되었을 것인데, 창녕 비봉리유적이나 울진 죽변리유적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통나무
로 만든 배와 노가 그것을 증명한다. 두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700년경에 해당한다. 이 밖에 전국
적으로 확인되는 흑요석이나 결상이식(玦狀耳飾)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와도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론 사람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석기시대의 예술품이나 치레걸이로서, 울산 신암리유적에서는 여성을 상징하는 토우(土偶)가,
양양 오산리유적에서는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 조각품이 나왔으며, 부산 동삼동이나 창녕 비봉리유
적에서는 사슴과 멧돼지를 새긴 토기도 나왔다.
무덤이 발굴된 예는 많지 않지만, 주로 남해안의 패총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최근 여수 안도,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 등에서 집단 무덤이 발견된 예도 있는데,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가 장착된 채로 묻
힌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