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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소(丸星運送店烏山營業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수원청년동맹뿐만 아니라 수진농민조합원으로도
                  활동했다. 변기재는 오산의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오산역 앞에서 운송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변기재가 근무했던 환성운송점이 아닌가 한다. 변기재는 해방 이후에도 박승극과
                  함께 사회주의 활동을 벌이며 화성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월북하였다.                           84)

                    이렇듯 1920년에서 1930년대의 수원군의 청년운동은 수원청년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수
                  원청년동맹을 움직였던 기반은 오산청년동맹이었으며 오산지역의 청년운동가들은 수원군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들이었다. 이들 오산 청년들은 오산청년동맹을 이끌며 수원청년동맹을 조직해 냈고,
                  신간회 활동, 수원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노동조합, 수원기자동맹 등의 일련의 활동 등을 주도

                                                                 85)
                  하면서 수원군의 모든 청년단체가 1934년 해소되기까지  적극적으로 청년운동을 펼쳐나갔다.




                  3. 오산노농학원 사건의 전개


                    오산지역에서 사회주의 청년 활동을 이끌었던 오산청년동맹원들은 수원청년동맹을 발족한 뒤 그
                  산하 성호지부의 활동을 활발히 벌여나갔다. 실질적으로 수원청년동맹의 활동 중 가장 활발했던 것
                  이 성호지부의 활동이었으며, 성호지부의 노동야학 활동은 일제의 대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

                                                                                       86)
                  탄압으로 오산지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모두 검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오산노농학원사
                  건(烏山勞農學院事件)’으로 불린 이 사건은 당시 수진농민조합의 적색농조사건과 함께 수원군 사회
                  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탄압 사건이었다. 성호지부가 운영했던 노동야학인 오산노농학원은 그간
                  오산지역의 청년들이 교육활동에 중점을 두고 꾸준한 활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초기 오산

                  살청년동맹의 활동 이전부터 대성학원의 운영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육 사업은 이들에게 가장 중

                  요한 활동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사상교육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외연적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노동야학의 운영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오산지역의 사회주의 청년운동가들은 무산아동들에 대한 교육에 각별하였다. 때마침 오산노농학

                  원의 운영이전 당시 조선일보사 주최의 문자보급운동이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의 유학생들이 고향에 내려와 동리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한글강습을 시켰다.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반의 가장 큰 목적은 한글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사는 한글을 교육
                  시키기 위하여 서울에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하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편에 문자보급과 문맹퇴치

                  를 위하여 고향에서 학생들을 교육시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많은 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와 열
      오산시사


                  84)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 水警高秘 제3709호, 1932년 9월 11일 :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
                    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 京高秘 제5746호, 1932년 9월 14일 ; 「邊基在 判決文」, 1932年 刑控第519號, 京城覆審法院, 1933년 1월 23일 ;
      제

      2             김시중 증언(수원시, 『수원 근ㆍ현대사 증언 자료집Ⅰ』, 2001, 83쪽) 참조  .
      권           85)  『朝鮮日報』 1934년 9월 10일 ; 1934년 9월 2일 박승극이 직접 수원경찰서에 여러 단체의 해산계를 제출하였다. 박승극은 수원청년동맹,
                    수원노동조합, 수원출판노동조합, 수진농민조합수원지부, 수원소년동맹, 수원기자동맹, 신간회수원지회, 조선프로예술동맹수원지부 등
                    의 해산계를 제출하였다. 박승극의 일방적 결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청년운동은 더욱 강력해진 일제의 탄압 속에
                    활동을 중지하였다.
    224           86) 『東亞日報』 1932년 8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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