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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이면’(이관구),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하자’(권태휘)는 등의 제목으로 강연도 하였다. 당시 오
산살청년동맹의 대표였던 공석정이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부터 사회주의 운동계열로 활동을 시작하
고 있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오산살청년동맹은 이미 총회에서 수원서 개최되는 신간회에 출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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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고 박한실을 대표로 선거하기도 했다. 이후 신간회 수원지회는 오산살청년동맹이 추진하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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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도 함께하며, 오산의 청년운동가 김기선의 추도회에 김노적, 우성규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수원청년동맹의 성호지부에서는 신간회 수원지회 성호분회와 연합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여 상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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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연합회관 지지 등에 관한 협의를 가지기도 했다. 성호지부의 경우는 대다수의 임원이 신간회 성
호분회의 임원도 겸하고 있어 양 단체의 연합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신간회 수원지회의 대회 때마다 경관을 임석시켜 감시하였다. 토의 금지 등을 시키며 집회
를 방해하였다. 신간회 수원지회의 설립 1주년 기념대회의 기념강연회가 금지당하기도 했다. 당시 총
무간사였던 공석정이 ‘인류진화 법칙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다가 중지를 당하고
일반 방청이 금지되기도 했다. 62)
신간회 수원지회는 1928년 12월 16일 제3회 정기대회를 화성학원에서 열었다. 이때 임원진이 개선
되어 지회장에는 김세환(金世煥), 부회장은 염석주(廉錫柱), 총무간사는 이건상, 김병호, 공석정, 홍
종각, 간사로는 김봉희(金鳳喜), 김상근(金相根), 김도생(金道生), 곽병준(郭炳俊), 김현조(金顯祚), 박
승극이 임명되어 지회를 구성하였다. 이때의 중요한 논의는 침체되어 있던 수원군의 청년운동을 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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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키자는 것이었다. 신간회 수원지회에서는 수원군을 대표할 만한 청년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
고 있었다. 이것은 신간회 수원지회와 함께 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체를 필요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날 정기대회가 끝난 후 각 구역과 반이 설치되었다. 이때 설치된 반은 양감반, 오산반, 세교
반, 장안반이었다. 64)
◇ 楊甘班
구역 양감면전원
일자 12월 30일
장소 양감면 社倉里
◇ 烏山班
구역 城湖面 남부
일자 1월 1일
오산시사
58) 『朝鮮日報』 1927년 10월 20일 .
제 59) 『朝鮮日報』 1927년 10월 19일 .
2 60) 『朝鮮日報』 1927년 11월 1일 .
권
61) 『東亞日報』 1929년 8월 10일 .
62) 『朝鮮日報』 1928년 10월 24일 .
63) 『朝鮮日報』 1928년 12월 23일 .
220 64) 『朝鮮日報』 1928년 12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