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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冕), 이남희(李南熙)가 종리사는 이정우가 활동하였다. 다른 면들과 비교할 때 비교적 교세가 큰 215
지역이었다. 성호면과 가까웠던 동탄면의 3월 21일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박두병(朴斗秉), 김재천(金 역사
在川), 김진성(金振聲) 등은 오산리의 천도교인이었다. 이들은 서로 합의한 후 인근 촌락과 연락하고, / 유적
기독교인과도 연락하면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지극히 평온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8)
수원군의 천도교는 3·1운동의 기본 바탕이었다. 1914년 천도교 중앙조직이 정비되면서 대교구가 · 유물
설립될 때 수원교구와 남양교구가 합쳐져 수원대교구로 승격되고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실질적으
로 3·1운동이 가장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일어났던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白樂烈)과
김흥렬(金興烈) 등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이끌어 갔다. 39)
오산지역의 3·1운동도 당시 천도교 수원교구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이름 없는 많은 천도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수원군의 천도교가 각 면과 리 단위로 조직되어 3·1운
동에 조직적 바탕을 제공하며 그 교세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2. 오산청년동맹의 활동과 인물
일제는 우리 민중들이 벌인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인 3·1운동 이후 지배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19년 10월부터 부분적인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우리
민중들에게 허용하였다. 그러자 각 지역에서는 수없이 많은 청년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또한, 러
시아 혁명의 영향과 함께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사회주의 청년단체들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는 더욱 교묘하게 우리 민중들을 탄압하며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192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청년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20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
同盟)이 창립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청년조직에 민중적·계급적 의식을 주입시키고자 했다. 그러
면서 노동자와 농민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직의 확대 속에 전
국적으로 군(郡) 단위의 청년동맹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청년총동맹은 실질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 해체되었다. 결
국, 조선청년총동맹의 몫은 지역에 설립된 군 단위의 청년동맹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수원군의 청년운동은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 과정
에서 지역 유지들은 계몽적 성격의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신간회 지부를 설치하면서 지역 내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반면 젊은 청년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적극적인 사상단체를 만들어 나
갔다.
이 과정에서 수원군에서 최초로 사상단체가 출현한 곳이 성호면 오산리였다. 사상단체로 처음 등
37) 「水原郡宗理院沿革」, 『天道敎會月報』191호, 天道敎會月報社, 1926, 31~32쪽 .
38)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1959, 872쪽.
39) 李東根, 「水原지역 3·1운동에서 天道敎의 역할 - 雨汀, 長安面을 중심으로」, 『京畿史學』 7, 경기사학회, 2003, 231~2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