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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산의 3·1운동 213
역사
성호면의 3·1운동은 당시 오산리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서울에서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조선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수원군 수원면에서 같은 날 만세운동으로 일어났다. 수원군 / 유적
의 3·1운동은 다양한 계층들의 참여와 종교조직의 활발한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수원군의 3·1운동 · 유물
은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벌어졌던 우정·장안면의 만세운동과 송산면의 만세운동이 대표적으로 제
암리 학살사건과 함께 주목받아왔다.
그 과정속에서 성호면 오산리의 만세운동도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3월
25일 시작된 오산리의 만세운동은 보통학교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
34)
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때 일본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오산
시장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시장에 모여 있던 3
백여 명의 군중들을 유진홍(兪鎭弘, 당시 34세)과 안낙순(安樂淳(順), 당시 44세)이 태극기를 휘두르
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성호면사무소와 오산
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현장에서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
喜市]가 유진홍 등 수명의 주도자를 체포하였다. 유진홍 등이 체포되자 시위 군중들은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더욱 기세를 높였다. 이에 오오키 순사는 어쩔 수 없이 체포한 자들을 석방하였다. 시위 군
중들은 유진홍 등이 석방되자 시위를 멈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거세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성구(李成九, 25세), 이규선(李圭璇, 25세), 김경도(金敬道, 34세), 정규환(鄭奎煥, 25세), 유진홍,
김용준(金用俊, 38세) 등이 다시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류종렬(劉鍾烈)에
대해 “행동을 같이 하지 않는 면장을 쳐 죽이라.” 외치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면사무소의 창유리와 창
문 등을 파괴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오산우편소로 몰려가 이성구와 이규선 등이 우편소의 전화기 등
을 파괴하고, 군중들은 우편소 부근의 일본인 거주지로 몰려가 일본인 주택에 투석전을 전개하며 일
본인 주택의 유리창, 판자 문 등을 파괴하면서 그 기세를 올렸다. 당시 시위 군중들은 7·8백여 명으
로 늘어나 있었다. 일본인 주택 11호 등을 파괴하면서 기세를 올린 시위 군중들은 계속하여 오산역을
습격하려고 행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를 하자, 시위 군중들은 어쩔
수 없이 해산하였다. 35)
오산지역의 3·1운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와 경찰서 앞에서의 실력행사로 나타났다. 또
한, 오산리의 중심지역에서 지배력을 높여가던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시위 군중들을 선도하여 만세를 부르다 옥고를 치룬 이들을 표로 나타내 보면 (표 8)과 같다.
34) 이정은, 「화성군 장안면, 우정면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 1995, 294쪽 .
3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1, 343~3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