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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에서 보는 것처럼 수원군에 이주해 온 일본농민들은 1종과 2종으로 나누어져, 2정보에서 5정
보의 토지를 불하받았다. 성호면의 경우 원리와 오산리에 1종 12호가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
한 동척의 이민정책은 조선에 이주한 일본농민의 중소지주화(中小地主化)를 목적으로 했다. 이중 1종
은 자작(自作)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지역 소작농민의 소작권에 지장을 주었다. 그리고 2종은 일부만
자작을 하고 거의 대부분 토지는 소작경영을 하였다. 동척이 이주민들에게 할당했던 토지는 새롭게
개간한 토지가 아니었다. 이는 회사 소유의 비옥한 토지로서 지역의 농민들이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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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던 농토였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점차 중소지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소유 토지를 경작하
기 위해 수원군의 소작농들을 고용하며 식민지의 지배적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동척농장은 일형면, 태장면, 안룡면, 봉담면, 매송면, 성호면 이외에도 송산면, 마도면, 향남면 등
에서 운영된 것이 확인되는데, 이곳의 소작인이 송산면에 9호, 마도면에 1호, 향남면 제암리에 10호
18)
로 소작인 가족이 110명이었다. 그리고 안룡면 배양리(培養里)의 경우는 50여 영세농가가 모두 동
19)
척농장의 소작인이었다. 이렇듯 동척농장은 수원군에서 각 면별로 최대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농
장을 경영했던 일본인 대지주였다. 1910년대 수원군에서 동척의 농사경영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6)과 같다.
표 6. 1910년대 수원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사경영 20)
투자액 소유지 면적(단위:反)
년도
(円) 畓 田 山林 原野 기타 계
水原郡 245,650 10,825 5,067 9 36 15,937
1912
南陽郡 3,000 79 79
水原郡 328,450 12,705 5,724 9 92 18,530
1913
南陽郡 80,504 1,538 218 23 1,779
1914 383,317 12,064 5,660 15 17,739
1915 381,958 12,026 5,660 15 17,701
1916 342,238 12,212 5,640 191 147 18,190
1917 342,237 12,212 5,570 191 219 18,192
위 표를 통해 보면 동척은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수원군에서 1,800여 정보를 소유한 대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유 토지 중에는 논이 1,200여 정보로 가장 많았으며 모두 소작 경영이었다. 이
오산시사 것은 동척이 농장을 설치할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배려로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보여
제 17) 金容燮, 앞의 책, 1992, 299쪽 .
2
권 18) 朴成壽, 『獨立運動史硏究』, 창작과 비평사, 1980, 321쪽 .
19) 『조선일보』 1930년 11월 12일 .
20) 『朝鮮總督府京畿道統計年報』 1912~1917년도판을 기초로 작성함 : 1914년부터는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로 수원군과 남양군이 수원군으
로 합쳐진 것을 나타내며, 1910년대의 조선총독부의 농업 통계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나 동척 농장규모의 변화 추이가
208 수긍되는 바 있고, 다른 참고 자료가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통계연보의 조사를 그대로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