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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오산의 시정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펼치게 되는 것이다. 269
1989년 1월 1일 당시 오산시의 면적은 40.54㎢, 세대 수는 13,939세대에 5만7,775명이었으며, 행 역사
정구역은 6행정동 48통 306반이었다가, 2019년 10월 31일 되면 오산시의 면적이 42.73㎢으로 늘고, / 유적
세대 수는 93,866세대에 22만4,113명(남 115,619. 여 108,383)에 이르며, 행정구역은 6행정동(24법정
동), 327통 2,219반이 된다. 근 30년 만에 인구가 4배 정도로 증가하여, 경기 남부의 중견도시로 성 · 유물
장한다. 실로 비약적인 발전이다. 오산은 서울 남쪽에 위치하는 수도권에 속하며, 철도와 고속국도가
도시를 관통하고 있다.
애향심과 시민화합을 위해 오산시 상징물인 시의 휘장, 오산시가(시의 노래), 오산시민헌장 제정,
오산시민의 날도 9월 15일로 제정하였다. 시목(은행나무), 시화(개나리), 시조(비둘기) 등을 1989년
제정하였고, 2015년 7월 30일이 되면 이중 오산시의 시화(市花, 시의 상징꽃)와 시조(市鳥, 시의 상징
새)를 재지정하였는데, 개나리에서 오산의 지명 역사성이 깃든 매화로, 비둘기에서 오산 지명에서 찾
아낸 까마귀로 재지정하여 오산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시로 승격된 첫해인 1989년 1월 1일에 초대 이승철 시장이 취임하였다. 시정방침은 으뜸가는 새오
산 건설이었다. 화합으로 신뢰행정을 쌓고, 봉사하는 행정을 펼치며, 창의를 발휘하여 오산시를 균형
있게 개발하는 것을 실천 항목으로 삼았다.
1989년도의 큰 정책의 핵심은 상하수도, 교량 증설, 도로 연장, 택지 개발과 주택건설 그리고 오산
천의 오염 예방, 고속도로 정비 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6개의 동사무소가 개청되었고, 대
한지적공사 오산출장소 개소 등 20여 사회단체, 시민단체, 관변단체가 발족되었다. 오산은 농촌지
역이었는데, 농업종사자가 11%(1,502호)이고 오산읍 시절이 농촌지역이었기에, 1980년대 오산읍도
도농복합도시가 목표가 되었다. 시 승격 당시도 도농복합도시 기조는 변함이 없었으며, 균형있는 도
시 만들기가 지속됐다. 시민의 생활 편리를 위하여 오산시장을 중심으로 한 도심 중앙부에서부터 하
수도 준설작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상수도 시설을 확충하며, 오산천 둔치에 휴식시설을 갖춘 체육시
설을 설치하였다. 시 승격 이후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도심지나 농촌지역이나 주거환경 개선 사업
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첫해 대표 사업도 건설이었다. 새로운 건
설계획을 세우는 것에 집중했고, 도로개설과 시민회관, 운동장과 교량들이 속속 건설되며 준공식이
이어졌다.
1990년도 오산시의 주택보급률은 60%였고, 3,100세대가 집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궐동과 원
동의 자연녹지를 택지로 개발하고 토지개발공사와 주택공사에 맡겨 1991년까지 주택 600동, APT
3,100세대를 지어 주택보급률을 75%로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경기도지역의 무주택 서민들이 오산
시로 이주해 오면 쉽게 자기 주택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도 세웠다. 1990년도 오산에는 175개의
기업체가 있었으며, 이곳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13,750명에 이르렀다. 175개 기업체 중 수출업체는
48개소이고, 새마을공장으로 지정된 곳은 6곳이었다. 산업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금속기계가 49
곳, 전기·전자업체가 35곳, 화학 관련 업체가 34곳, 제지 목재업이 24곳, 섬유·피혁이 12곳,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