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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사람들이었다. 농민 자신들의 빈궁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농촌                                          265
                  마을에는 청년이장들이 출현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전 단계라고도 볼 수 있는 4H운동의 4H가 화성군                                          역사

                  에 조직된 것은 1955년경이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4H회원들은 농산물                                        /  유적
                  품평회를 열고 잘 지은 농산물에 대하여 순위를 매겨 시상함으로써 영농의욕을 고취했다. 농한기 철

                  에는 새끼꼬기 경연을 하였다. 1964년에는 청소년의 달 행사로 3대 교육 행사를 진행시켰다. 경운기                                        · 유물
                  운전교육, 식량증산, 퇴비만들기, 퇴비증산, 풀베기퇴비 증산왕제도가 있어 마을 단위로 서로 경쟁하

                  였다. 오산읍에 4H구락부연합회가 조직된 것은 1967년이었다. 농촌의 청소년 단체로서 4H구락부가
                  한국에 소개된 지 20년 만에 화성군 오산읍에 농촌 청소년들이 유능한 농촌후계자로 나타나게 된 것

                  이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화성, 평택 등지의 4H운동은 우리나라 4H운동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
                  다.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기는 1970년대이나, 1960년대부터 마을 단위로 전 단계의 새

                  마을운동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농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1년 오산읍에는 화성군
                  오산읍 단위의 농협협동조합이 시작되어 농업협동조합법에 의거 농협업무와 금융업무를 보았다. 이

                  농업협동조합의 농민사업과 금융신용사업은 농촌지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1970년대의 캐치프
                  레이드 근면, 자조, 협동의 실천은 1960년대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4H운동을 통해 양성됨으로써

                  시작될 수 있었다. 환경개선, 소득증대, 시범마을을 만드는 운동은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시키고자 하
                  는 농촌 청소년들의 염원과 그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데에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가뭄극복을 위한 노력이 마을 단위로 일어나고 국가는 이를 도왔다. 새마을사업 가꾸
                  기에서는 농민들의 정신개발촉진운동에 접속되고, 시멘트와 철근 등이 지급되었고, 그것은 새마을회

                  관 건립 토대가 되었다. 새마을회관은 집회시설로도 제공되었고, 문화예술의 공연장이 되기도 하였
                  다. 이러한 국가 주도형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조직이 각종 행사나 사업에 동원되는 조직이 되고 여당

                  의 지지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종 산업체도 건설되고 있었다. 1966년 계성제지주식회사가 오산에 들어오고, 1968

                  년에는 대성모방이 원리에 공장을 설립하였다. 1971년이 되면 가장동에 동양보일러공장이 세워졌다.
                  누읍동에도 신호제지가 들어섰다. 1973년에 양산리에 미원모방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74년이 되

                  면 외삼미리에 대원화성주식회사가 설립되고, 1975년에는 가수리에 금성전기(주)가 설립된다. 이 해
                  에 원리에 이화다이아몬드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고, 1979년에는 원리에 도성섬유, 갈곶리에 경원산

                  업(주)과 주식회사 진웅, 내삼미리에는 다산산업주식회사가 각각 설립되었다. 이러한 산업체의 증설
                  로 인해 근로자가 유입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오산읍은 활기를 띠며 점차 변화되어 갔다. 1969년 오

                  산읍은 20개리, 56개 마을에 3,000호(세대수 약 3,500호) 중 농가 호수는 75%이며, 나머지 25%는
                  상공업, 공무원, 기타 자유업에 종사했다. 그래도 농업 종사자가 다수를 차지하였지만, 점차 산업, 상

                  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농업 인구는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68년 12월 경부고속도로
                  가 오산까지 준공되었고, 서울과 동시에 톨게이트가 개설되었고, 1969년에는 오산에서 천안 간도 개

                  통되었다. 톨게이트의 우선 개통은 오산 배후에 군사적 목적과 서해권의 경제적 이유도 작용한 것이
                  다. 1970년이 되면 수원시에 있던 화성군청사가 오산읍으로 이전되며, 화성군의 행정중심지로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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