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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환 대위는 2.36인치 로켓이 적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제3대대 부대대장 강은덕 대위와 함께 263
적 전차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명중시켰으나 허사였다. 적의 선두전차는 아군을 공격하면서 평택 서 역사
정리를 향해 남하하였다. 오후 5시쯤에는 적의 보병부대가 전차 3대를 선두로 차량에 탑승한 채 아군 / 유적
의 연대 진지로 접근하고 있었다. 적들이 1km까지 접근하자 박격포와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북한 인민군은 도로 가까이 있는 66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주공격을 받았던 제9중대 · 유물
는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제1소대 오윤근 중위 지휘하의
33명의 소대원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소대장이 전사하자 분산 철수하고, 3개 소대를 일선에 배치한
제3중대도 치열한 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연대장 직
무대리인 김희준 중령은 1번 도로 부근에 배치된 2개 중대가 분산 철수하게 되자 퇴각을 결심하게 되
었다. 1950년 7월 5일 오후 6시쯤 연대 주력은 평택과 안성 중간지역을 통과해 성환으로 빠져나왔고,
제1대대장을 포함한 일부 병력은 평택으로 철수했다. 오산에서 철수한 제17연대는 그 후 제1군단의
수도 사단에 배속되었다.
3. 오산전투(죽미령전투·갈곶리전투) 후 오산 상황과 전투의 의의
이로써 오산지역은 적 북한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인민군은 2개월 18일간 오산지역을
지배하다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끊기고 미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퇴각하기 시작한다.
1950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미31연대 제2대대는 인민군 전차대와 수원-오산간 국도 및 철로 변
지대에서 전투하였고, 1950년 9월 28일까지 인민군의 모든 진지를 탈환하였다. 서울 수복 후 3개월
10일 만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7일 오산을 다시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유엔군
은 1951년 1월 15일 오산지역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1951년 1월 16일 오산을 재탈환하게 된다. 6·25
한국전쟁은 전 국토가 전쟁터이었으나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최초의 전투가 시작된 곳이 오산이므
로 오산 죽미령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오산죽미령전투가 패배한 전투로 기록되긴 했으
나, 스미스부대는 북한군이 남하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임무가 주어졌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
다고 평가받는다. 이 전투로 인해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고, 이후 전황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낙동
강전투에서 좋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3년 1개월간의 전쟁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
은 전쟁이었다. 남북한에서 150만의 사망자와 360만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온 국토가 파괴되어 초토
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민족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고 남북한 대립이 고착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
전이 성립될 때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이 한국전쟁 최초
의 전투를 담당하였고, 인명피해를 입은 죽미령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나눈다는 혈맹의 동맹군
으로 공동방위의 필요성을 공감한 때문이다. 북한군도 오산죽미령전투에서 제4사단 문화담당 부사
단장을 포함하여 전사자 42명, 부상 85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전차 4대를 잃었다. 한국전쟁이 국제
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오산지역에서의 전투양상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국군, 북한 인민군, 유엔군
(미군), 중공군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싸웠고 소련은 북한 인민군을 지원하였다. 오산은 전 세계 16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