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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국도를 따라 일렬종대로 접근해 오고 있던 북한 인민군 전차대와 후속하는 차량부대 및 보병 261
부대는 미군 포병부대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차량이 불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포탄에 박살이 난 북 역사
한군들의 시체가 허공에 난무하는 등 처참한 참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 / 유적
은 멈추지 않았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국도 양변으로 산개한 북한군은 죽미령 동쪽의 뱀골(92m) 능선으로 침입하여 · 유물
미군들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1선에서 권총을 빼들고 지휘하던 스미스
중령은 곁에서 불을 뿜던 기관총 사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자신이
그 기관총을 들고 계속 총신을 휘두르며 사격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오후 2시쯤 북한 인민군은 10배가량 되는 우세한 병력으로 삼면에서 공격해 왔다. 이에 스미스부대
원들은 사투를 계속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불리해져 한 시간 후면 전 대원이 전멸할 상황
에 처하게 되었다. 미군들의 퇴각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실탄이 동났음은 물론 적 북한 인민군
의 포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죽미령을 우회한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포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의식하게 된 스미스 중령은 어쩔 수 없이 예하 부
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으며, 안성과 평택 간을 거쳐 천안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그 시각이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 40분이었다. 화력 지원이 없는 주간에 철수하게 되어 적의 공
격을 받으며 철수해야 했기에 피해가 컸다. 미군은 최초의 전투에서 540명의 보병과 포병 중에서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 사병 26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보았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한 종군기자는 ‘스미스부대 전멸’이라는 기사를 써 보냈다한다. 이 기사
가 전 세계에 퍼지자 북한 인민군 공격이 내전 수준이 아닌 제2차 대전의 승전국 미군을 압도할 만한
잘 계획된 공산주의 팽창을 위한 전쟁인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에서 최초의 지상전을 벌였고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해야 했던 스미스중령
(1916~2004, Charles B. Smith)은 북진(北進) 대열에 참가,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 지점까지 올
라갔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 11월 10일 전출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1967년 육군 준장으
로 예편해서 아리조나주 피닉스시에서 살다가 2004년 5월에 사망하였다.
이러한 남아있는 전투 기록으로 보면 북한 인민군의 남진을 쉽게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미군의 낙
관적인 기대가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스미스부대원들도 미군
이 전선에 나타난 것을 알면 북한 인민군이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는 맥아더 원수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봐진다. 북한 인민군과의 첫 지상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미
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북한 인민군의 전투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미스부대와의 최초 교전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군의 한국전 참전 사실을 확
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남침 공산화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전투라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