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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국민학교 세교분교장으로 개설되었다가 1949년 5월 5일 광성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된다. 오산에 257
공립국민학교가 성호, 오산, 삼미, 광성, 이렇게 4개교가 되었다. 1950년 6월 2일에 공·사립국민학 역사
교의 명칭을 공·사립 명칭을 빼고 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당시 교육에 있어 큰 문제점은 자격을 / 유적
갖춘 교장과 교사가 부족하여 충분한 교원 확보가 어려웠던 점이다. 또 광복 이후 미군정시기까진 화
성군지역에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지 않아 중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수원 등 외지로 진학을 해야 · 유물
했던 점이다. 이렇게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추진됐던 것은 교육 부분에 대한 투자였다. 일제강점
기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낸 것도 바로 이러한 교육에 대한 열정적 운동 자세였다.
1947년 6월 1일 성호초등학교의 교실 1개를 빌려 공민학교로 출발한 성호고등공민학교가 1948년
11월 20일 설립인가를 얻어 학생들에게 중학교 전 과정 교육을 시작하였다. 설립 인가 당시의 재단법
인 이사회 이사는 서상길, 오산중·고등학교 초대교장을 역임한 서영석, 김학배, 최병국, 조광현, 서
종식, 서창석, 심인홍, 이철배로 구성되었다. 1950년 6월 8일에는 정식 중학교로 승인받은 오산중학
교가 1학년 신입생을 모집하였고, 6월 21일에는 신입생 53명을 받아 오산에서 처음으로 중학교 입학
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인해 오산의 성호국민학교도 학교 교육은 일단 중단되었다. 학교 건물
은 파괴되고, 남은 건물은 미군이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전쟁 수복 후에 다시 모인 학생들은 교실 없
는 운동장인 당시 성호초등학교 교정(현재 성산초등학교 교정) 나무 밑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하였
다. 오산중학교도 7월 10일에는 서부교사가 파괴되었고, 9월 27일엔 유엔군이 오산을 재탈환하게 되
어 10월 11일엔 다시 개교하게 된다. 교직원은 교장 서영석, 교사 이기춘, 장세복, 최찬균 등으로 정
상적으로 학교는 운영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남하하게 됨으로서 오산중학교
는 12월 12일부터 임시 휴교하게 된다. 1951년 1·4후퇴 후 7월 1일부터 수업을 재개하였으나, 교사는
불타 없어지고, 마땅한 교육장이 없어 법인 이사 서상길 자택 마루에서, 서영석 교장 사택에서 수업
을 실시하였다. 교직원은 서영석 교장, 유경노 교감, 이기춘, 장세복, 공형식, 이병렬 교사 등이었다.
전란 중 교육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교육은 멈춤이 없었다. 이렇게 오산인의 교육열은 대단하였
다. 오산의 초·중등 교육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1954년 3월 17일에는 오산고등학교 3학급이
설립인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15일에 27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오산지역 최초의 고등학교 교육이 실
시된 것이다. 교사는 청학리 산17번지에 목조건물로 된 중학교와 함께 사용하였다. 초대 교장은 서영
석 오산중학교 교장이 겸임하였다. 1958년도에 오산중학교 6회 졸업생 133명과 오산고등학교 2회 졸
업생 42명이 졸업하면서 학교의 기틀이 다져졌다. 오산고등학교는 이해에 서울대 6명, 고려대 3명을
합격시키며 명문고등학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오산중학교, 오산고등학교에 이어 1956년에는 오산여자중학교가 공립학교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
시 교실이 없어 성호국민학교 구교사(현 성산초)의 일부 2개 교실을 사용하였다. 설립추진위원회 구
성은 추진위원장으로 오산면장인 조광현, 부위원장은 김창순과 서상길이었으며, 오산면 총무계장 한
세택이 간사를 맡았다. 성호국민학교(이 당시 위치 현 성산초)가 6·25한국전쟁으로 교사가 거의 파
괴되었으므로, 1957년 현 성호초등학교로 이전해 나갔다. 성호국민학교 구 교정 자리는 대대적인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