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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힘의 공백이 초래되었고,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위한 투쟁, 새로운 국가건설의 사명감, 이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야망을 통한 정치무대에 올라

                  선 이들 간에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인 것이 바로 해방 정국이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나타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대립은 여운형과 송진우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대립은 건준의 결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운형 측은 국내의 민족역량
                  을 중심으로 국외의 제반 단체를 망라한 독립정부 수립을 주장한 반면, 송진우 측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를 정통정부로 추대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해방정국을 주도하던 주요 행위 주체였던
                  건준은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의 조직개편을 시도하였다. 한편

                  친일세력이 많았던 한민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승만과 중경의 임정과의 관계
                  를 돈독히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인공이나 임정 모두 연합국 또는 미군정으로부터 정식정부로 인정받

                  지 못함으로써 해방정국에서 명멸한 수많은 단체와 마찬가지로 같은 운명을 겪고 말았다.
                    광복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소련군은 한반도 북쪽에 진주를 완료하고 자신이 점령한 지역 내

                  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1945년 9월 7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건준의
                  후신인 조선인민공화국과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군사정부만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유일한 행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결국, 한반도의 운명은 38선 양쪽에 진주한 미·소 양군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1945년 10월, 현재 남한에서는 크고 작은 정치단체들이 난립하여 54개의 정당이 등록하였으며, 이
                  승만도 1945년 10월에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이 되면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

                  국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남한의 우익 정당들을 잠정적으로 통합하
                  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좌익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좌·우

                  익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1946년 3월이 되면 반탁과 찬탁이 격화되는 가운데, 서울에서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서 신탁통치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을 신탁통치안에 찬성하는 정당, 사회단체로 제한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진전되지 못했다. 반탁을 주장한 우익진영은 신탁통치를 위한 임시정부의 수립에서 배제되어
                  야 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찬·반탁이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임을 강조하면서 모든 정당과 사

                  회단체와 협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이 끝내 굽혀지지 않음으로써 좌·우익 관계
                  는 더욱 악화되었고,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소득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오산시사          1946년 7월이 되면 우익 측의 김규식과 좌익 측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가 구
                  성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비교적 폭넓게 형성되어 있던 중도적 정치세력을 기반으

                  로 한, 이 움직임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미군정은 한국에서 모스크바
      제

      2           3상회의의 결정을 실현시킬 의무가 있었으므로 이승만, 한민당 등 우익진영의 반탁운동을 소외시키
      권
                  고, 1946년 5월에 있었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극좌세력을 탄압하면서, 김규식,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1946년 12월이 되면 중도적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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