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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장     현대의 오산                                                        · 유물






                                                 남경식 | 오산학연구소 상임위원









                  제1절   광복과 대한민국 수립기의 오산





                  1. 해방정국과 분단


                    폭주하던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에서 해방되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국광복은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결과

                  이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
                  점으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 무력항쟁의 실체인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거하였다. 국내에

                  서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혹독하였으며,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은 민족의 자립과 독자성, 문
                  화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국제적으로 우리의 독립 의지를 확인케 하였으며, 전후처리를 위한 강대국 회담에
                  서도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기에 이르렀다.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 측의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가 카이로선언(발표는 12월 1일)을 통해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
                  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고 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았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이를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이 선언에 따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자 한국은 곧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에 대한 강대국들의 약속은 즉각적인 독립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의 독립이었
                  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한국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동

                  북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미국과 소련 어느 나라도 한편이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은 남·북이 분할되고, 미국과 소련이 나누어 점령하게 되었다. 소련

                  이 먼저 한반도에 도착하여 남하해 왔으므로 미국은 소련의 점령지역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킬 것을 제의하였고, 소련이 이에 동의

                  함으로써 38선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남·북이 분열, 대립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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