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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굴자료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기원후 2세기 이후의 경기도지역 문화양상을 새롭게 이해하 61
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 시기의 역사를 문헌사학에 기초하여 백제 중심적 시각에서 서술하는 것이 일 역사
반적이었으나 범마한적 분묘와 토기가 경기도 서부와 남부에서 속속 확인됨에 따라 기존의 견해는 / 유적
크게 수정되고 있다. 9)
그림 1에 표시된 바와 같이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기도 서부의 김포-인천지역은 마한 · 유물
내에서도 분구묘가 사용되는 지역으로 이해되고 있고, 이에 비해 경기남부와 충남의 내륙지역은 그
와는 달리 주구토광묘를 묘제로 사용하는 지역으로 구분된다. 10)
그 가운데 오산지역이 포함되는 후자(後者)의 분포지는 북측으로는 서울, 남측으로는 평택-안성을
지나 충남지역으로, 동측으로는 용인 두창리유적을 포함하는 범위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용인의
마북-신갈 일원과 오산의 궐동-수청동 일대가 보다 밀집도가 높은 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한
점은 이 양지역이 당시 보다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해안을 따라 범마한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분구묘가 인천-김포지역에서 속속 발굴되고 있고 출
토된 유물들에는 낙랑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철검이나 대도, 영남지역과의 연관성을 보이는 봉부
좌우돌출형의 철모, 전라도지역과 유사성을 보이는 선형(扇形)철부 및 부여지역과 상관관계가 있는
금제귀걸이 등이 존재하여 주목된다. 그것은 그만큼 이지역이 주변지역들과 직간접적인 교류를 하면
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철기의 급속한 발달이 눈
에 띄는데, 유물 중 농공구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나 그보다도 강력한 살상력을 갖는 철제무기가 더
우세한 점유율을 갖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비해 경기 중부의 내륙으로 들어온 경기남부 지역들은 분구묘가 아니라 주구묘 내지는 단순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는데, 토기의 양상은 유사하나 철기류에서는 다소 지역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마한지역에서는 (관곽)토광묘에서 분구묘나 주구토광묘로 변화발전하는 양상이 확인되지
만 서울~경기도 북부와 동부 등에 산재해 있던 백제 및 예지역의 경우는 취락유적이 많이 조사되고
있는데 비해 분묘유적은 상당히 드문 편이고 적석분구묘나 즙석봉토분 및 토광묘가 일부 알려져 있
는 정도여서 상호 간에 분묘를 중심으로 한 비교는 어려운 실정이다.
9) 권오영, 2009 「원삼국기 한강유역 정치체의 존재양태와 백제국가의 통합양상」, 『고고학』8-2, 중부고고학회 .
10) 김귀옥, 2014 「경기지역 마한 분구묘의 구조와 출토유물」 『한국고고학의 신지평』, 제38회 한국 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조가영, 2014 「경기도지역 마한 분구묘의 연구 성과와 과제」 『한국고고학의 신지평』, 제38회 한국 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