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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동의 경우 단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주역이 이동하며
                  원삼국기와 신라 이후의 취락은 인근의 별도 공간에 분포함을 반영한다.

                    그 다음은 저장시설인 단면 플라스크형 저장고가 매우 많이 발견된 점이다. 내삼미동-외삼미동의
                  백제 취락만을 위한 저장시설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다. 따라서 외부, 아마도 백제 중앙의 의도가

                  개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이 서울에서 경기 남부, 충청남도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입지한
                  점을 고려한다면 백제의 영역 확장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삼미동-외삼미동 취락의 주거지는 구조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한반도 중서부-서남부에서 크게
                  유행한 사주식 주거지(그림 3)도 발달하지 않았으며 중부지역의 여철자형 주거지도 매우 적다. 주거

                  지의 바닥면보다 높게 구들을 설치한 장방형 주거지가 이 지역의 특징이다. 기전문화재연구원 14호
                  주거지가 유일하게 백제 중앙과 유사한 구조,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는 점을 볼 때 이 주거지에 거주

                  한 인물이 오산지역을 지배하려는 백제 중앙의 정책을 집행하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14)
                    세교분묘군은  북에서부터 금암동, 수청동, 궐동, 누읍동 등지에 걸쳐 널게 분포하고 있다. 발굴조
                                                   15)
                                                                            16)
                  사된 분묘의 총 수는 378기에 이르는데  실제로는 400기를 넘어서서  경기 남부 최대 규모이다.
                                                                             17)
                    세교지구에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고 있음은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대규모 원삼국-백제 분묘가
                                                                                                     18)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우미아파트 부지에서 7기의 주구가 달린 목관묘가 발굴조사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면서 수청동, 내삼미동, 금암동에 걸친 세교 4지점과 5지점으로 명명

                                                               19)
                  된 구역에서 303기의 분묘가 발굴조사되었다.(그림 4)  시간적으로는 원삼국기에서부터 백제에 걸쳐
                  있는데 그 분기를 정확히 나누기는 곤란하다. 주구가 묘광을 감싼 경우가 170기, 주구가 확인되지 않

                  은 경우가 133기로서 전자가 조금 많다. 주구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원래 없었던 경우와 후대의 삭
                  평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공존하므로 주구가 있는 분묘가 숫적으로 우세하였음이 분명하다. 남

                  측의 궐동에서 2세기 무렵 주구 없는 목관묘가 사용되고 3세기 무렵부터 주구 달린 목관묘가 발전하
                  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세교지구에서는 주구 달린 목관묘가 발전하다가 다시 주구가 탈락하는 양상

                             20)
                  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아산의 용두리 진터에서 명암
                  리 밖지므레 유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전형적이며 청주 오송지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주구가 없건 있건 대부분은 묘광의 장축 방향이 등고선에 직교하는데 이는 중서부 목관묘나 주구
                  토광묘에서는 이질적인 현상이다. 오산지역의 특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산시사        14) 세교지구 조사 과정에서 발굴조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하고자 한다.
                  15) 강지원, 2016, 「오산 세교택지개발 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성과」 『오산학연구』 2, 오산문화원부설 오산향토문화연구소.
                  16) 이남규, 2011, 「오산 독산성 일원 원사·고대문화의 형성과 추이」 『중부지역의 고고문화와 역사』, 한신대학교출판부.
                  17) 기전문화재연구원, 2003, 『오산 세교 택지개발지구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제
      2           18) 진수정, 2006, 『오산 수청동유적 -우미아파트 건설에 따른 발굴조사 보고서-』, 기전문화재연구원.
      권           19) 경기문화재연구원, 2012, 『오산 수청동 백제 분묘군 Ⅰ~Ⅴ』.
                  20)  세교지구에서도 주구가 달린 목관묘 이전 단계의 목관묘도 있으나 궐동 유적에 비하면 그 빈도가 낮다. 따라서 궐동과 세교지구에 걸
                    쳐 주구 토광묘 이전의 목관묘가 존재하고 그 중심지는 궐동이었으며 주구가 달린 주구토광묘 역시 궐동과 세교지구에서 함께 발생하
                    지만 이번에는 그 중심지가 세교지구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른 단계는 궐동이 중심, 점차 세교지구로 중심이 북상하였음을
     78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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