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제2권_Neat
P. 83
의 물질문화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단위 정치체를 구성하는 작은 지역 단위 간의 차이점을 83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
백제 중앙과 지역 정치체 사이의 관계는 산성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의 축조 및 사용의 / 유적
주체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직결된다. 수원-화성-오산 일대의 정치체 중 성곽이
분포하는 경우는 모락산성이 있는 의왕유적군, 소근산성이 주변에 있는 길성리토성 유적군, 청명산 · 유물
성이 있는 마도유적군, 그리고 소규모의 토루가 복수로 존재하는 우정유적군 등이다. 반면 성곽이 없
는 유적군은 서둔동유적군, 태안유적군, 봉담유적군, 향남유적군 등이다. 동탄-오산유적군은 독산
성의 축조 시점 구명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독산성에서는 아직 백제 토기가 소량 발견된 것에 불
과하므로 산성 축조와 운영의 주체가 백제 중앙인지 지역 정치체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화성 길성리
토성은 한성 1기에 축조되었으며 백제 중앙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지 정치체가 축
성의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소근산성과 모락산성에서는 한성 2기의 중앙양식 토기가 주로 출
토되는 점에서 축성 및 운영 주체가 백제 중앙일 가능성이 높다.
제2절 고구려
4세기 전반 한반도 서북지방을 무대로 동아시아 교섭망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
이 축출되자 이 지역의 소유를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분쟁이 촉발되었다. 이 분쟁은 영토에 대한
소유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교섭의 중심 역할을 누가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
되어 있었다.
근초고왕 대인 4세기 중엽만하더라도 백제군이 황해도 지역까지 북상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가 수세에 몰렸으나 소수림왕, 고국양왕 대의 내부 개혁을 거쳐 광개토왕 대에 이
르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군이 경기도 북부와 강원 영서지역을 지속적으로 압박해
오면서 백제는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의 국력을 고갈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
려 장수왕은 바둑의 고수인 도림을 백제에 파견하여 개로왕의 총애를 받도록 하였다. 도림은 개로왕
의 총애를 얻은 후, 그를 부추겨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한강의 범람으로부터
32)
왕성인 한성을 보호하는 제방이 만들어지고, 선왕의 무덤이 증축되는 등 도성의 경관이 일신되었으
나 국고는 고갈되었다. 백제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고구려에 망명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
만년 두 장수의 협조를 얻은 고구려 대군은 마침내 475년 대군을 파견하여 북성(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하고 개로왕은 남성(몽촌토성)으로 대피하던 중 생포되어 아차산에서 살해당한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백제가 일시 멸망하고 왕실이 남천하면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32) 당시의 백제 왕성인 한성은 북성인 풍납토성과 남성인 몽촌토성을 두 개의 축으로 삼는 양성체제였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