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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수동 Ⅱ-1호 수혈주거지, Ⅱ-1호 고상건물지, Ⅱ-2호 우물에서는 암문을 시문한 토기가                                         85
                                                                                   35)
                  작은 편으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Ⅰ지역 수습 유물로도 2점이 더 확인된다.  보고서 고찰편에서는                                           역사
                  Ⅰ-1호 수혈에서도 한 점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도면이나 유물 기술 내용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  유적
                  격자 암문이 반드시 고구려만의 특징은 아니어서 통일신라 토기 중에도 간혹 확인되는 경우가 있지

                  만 가수동 유적의 암문이 만약 고구려 토기와 관련된다면 이 유적에서 단기간이나마 고구려 문화가                                            · 유물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제3절    신라


                    551년 백제가 잠시 한강 하류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신라는

                  553년 한강 하류역을 신주로 편제하였고 오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557년에는 신주를 폐지하고 북
                                                     36)
                  한산주로, 568년에는 남천주로 바뀌면서  신라의 영역지배는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통일전쟁이 종
                  료된 후 중부지역에 한산주가 설치되면서 오산도 한산주에 편입되었다.
                    신라가 오산지역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은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강유역을

                  탈취한 신라의 전략은 중요한 거점에 산성을 쌓아서 지역민에 대한 통제와 수취를 강화하고, 고구려
                  와 백제에 군사적으로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양주 대모산성, 하남 이성산성, 서울

                  아차산성과 불암산성, 대모산성, 양천고성, 호암산성, 고양 행주산성, 용인 할미산성, 이천 설봉산성
                  과 설성산성, 여주 파사성 등 수많은 신라의 산성이 축조되었다.

                    오산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관방시설은 독산성이다(그림 7).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벽과 축대는 조
                                                                                                 38)
                                                37)
                  선 후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처음 축조된 시점은 신라로 소급되었다.  이로
                                                                   39)
                  써 그동안 신라 유물이 성 내부에서 자주 채집되던 사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어느 구간이 신라 당시에 축조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성벽의 안에 신라 성벽이 있는지 여부

                  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40)
                    독산성과 관련된 신라 유적으로는 독산성 북편에서 발견된 양산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황구지천에 인접해 있는데 조사구역이 좁아서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었으나, 일반적인 취락
                  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등고선을 따라 2줄의 석열(축대)이 있고 수혈 유구 1기가 발견되었을 뿐이






                  35)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오산 가수동 유적』.
                  36) 양정석, 2017, 「화성시의 신라-통일신라시대 유적과 문화」 『화성시 고고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화성시.
                  37)  노태호, 2018, 「오산 독산성 축대와 건물지의 성격과 양상 -2017년도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오산학연구』Ⅳ, 오산문화원 부설 오산향
                    토문화연구소.
                  38) 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19,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2019년 발굴조사 현장 시민 공개 설명회.
                  39)  김아관·안성현·윤명준·최광훈, 2016, 『오산 독산성 -오산 보적사 요사채 증·개축부지 문화재 시(발굴)굴조사』, 고려문화재연구

                     원·대한불교조계종보적사.
                     이형원·강정식·정지영, 2018, 「오산 독산성 백제·신라 유물의 고고학적 의의」 『오산학연구』Ⅳ, 오산문화원 부설 오산향토문화연구소.
                  40) 한신대학교박물관, 2009, 『오산 양산동 신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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