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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유구의 기수에 비해 토기의 출토량이 많고, 그것도 조리, 저장 용기보다 고배와 대각 등 소형 기
                  종이 많은 점, 다종다양한 철기류 및 석제 저울 추가 발견된 점을 고려하면 생산, 저장 등의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유적의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 폭이 넓은 편이다.








































                                                  그림 7. 독산성 발굴조사 광경




                    출토 토기 중에는 “井”, “華山”, “塩”, “水”, “川”, “卯(卵)” 등의 한자가 음각된 것들이 있다. “水”의

                  아래에는 “土”변인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남아 있으므로 “水城”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토기의
                  명문은 신라 경덕왕 19년(759년)에 개명된 水城郡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독산성을 중심으로

                  한 오산 서북부 일대가 화성군 일부 지역과 함께 수성군으로 편제된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41)
                    양산동유적의 바로 북쪽 건너편에는 황구지천을 사이에 두고 화성 안녕동 유적이 위치한다. 이 유

                  적은 수전과 우물, 수혈주거지와 지상식 건물, 수레 흔적, 각종 수혈로 구성되어 있다. 지상식 건물지
                  가 30동이나 발견된 점, 하물을 운반한 수레 흔적 등은 이 유적이 일상적인 취락이기보다는 물류와
      오산시사                            42)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안녕동유적과 양산동유적은 비록 현재는 화성시와 오산시로 나뉘
                  어져 있으나 독산성 북편에서 황구지천을 무대로 이루어지던 물류, 교통, 생산과 저장 등 다양한 생

      제

      2
      권
                  41) 권오영, 2009,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오산」 『오산시사 1』, 오산시.
                  42) 최병화, 2017, 「신라-통일신라시대 화성지역과 안녕동유적」 『고대의 화성을 그리다』, 화성시.
                       홍보식, 2018, 「화성의 통일신라시대 취락 -안영동유적과 청계리유적을 중심으로-」 『삼국통일과 화성지역 사람들의 삶의 변화』, 화성
     86             시 역사문화 학술세미나 발표 자료집, 화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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