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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시장(河江市場) 2, 7, 12, 17, 22, 27일
반월시장(半月市場) 1, 6, 11, 16, 21,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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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일 양력 실행, 『동아일보』, 1937년 12월 21일 7면)
산업
1940년대에 들어서 수원지역의 상업상태를 조선식산은행에서 발간한 「식산조사월보」에서 보면 주 · 경제
요 거래품목은 곡물이었지만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한국의 군수지하자원 개발과 관련하여 / 보건
16)
팔탄면 일대에 남양중석광산(광업권자 : 이완석)이 운영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일제가 우리 민 · 환경위생
족의 인력·물자·경제력 등의 수탈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부
문에서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이 당시에는 일제에 의해 철저한 통제 경제가 실시
되고 있었으므로 수원지역의 곡물배급은 생활필수품 소매상업조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 · 사회복지
한 상황에서 1940년 경기도 식량배급조정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석탄·연탄에 대한 판매취체규칙이
제정되었다. 1941년 5월 중 수원의 주요 물가동향을 보면 정율(精栗) 1석(石)이 도매가로 29.90원이 / 사법
었고, 조율(粗栗)은 16.50원, 대두는 30.80원이었다. 그리고 이즈음에는 미곡상인 중에서 미곡거래 · 치안
의 두절로 인해 제면업으로 전업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하였다. 이때 수원의 제면업자는 12호였고
생산량은 약 12만 관에 달하였다. 이해 말에는 수원상공회의소의 설립인가가 내정되어 다음해 2월에 · 소방
설립인가를 받았다. 17) · 언론
제3절 해방후 오산지역의 산업과 경제
한국전쟁을 거치며 시작된 서울의 비대화는 여러 면에서 경기도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
는데 산업과 경제의 발달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적·역사적 특성으로 경기도 지역은 일찍부터 농업
외에 제조업, 상업을 발전시켰지만 특히 서울과의 밀접한 지리적, 경제적 특성은 이후 경기도의 산업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기도의 인구는 1961년 270만 명 수준에서 1978년 말 현재 445만 명으로 늘어났고(약 1.63배). 가
구수는 1961년 486,244가구에서 1978년 말 909,260가구로 1.86배 증가했다. 경기도의 인구나 가구
수의 증가율은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에 들어 더욱 빨라지고 있으며, 그 속도는 우리나라의 평균
인구 증가속도보다 빠르다.(<표 10> 참조) 인구수에 비해 가구수의 증가율이 높은 것은 도시화와 핵
가족화가 결합된 지방에서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단신인구이동 경향을 반영한다.
16) 『화성시사 7』, 215쪽 .
17) 이창식, 『일제강점기 민생실록』,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