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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 간행된 『한국수산지』에 의하면 그 당시 수원에는 성내장(4일 개시)·성외장(9일 개시)·오
산장(3,8일 개시)·발안장(5,10일 개시)·안중장(1,6일 개시) 등 5개의 장시가 개설돼 있었으며 이 가
운데 특히 오산장은 물자의 집산이 다대하여 시황이 대단히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이어 1905년 1월 1일 서울~초량간 경부철도가 개통되고 영업이 개시되었
는데 경부선이 지나는 길에 수원역·오산역이 위치해 있어 물자의 유통이 상당히 원활한 상태에 있
었다. 수원의 성내시장은 연간 거래액이 28만8천 원에 달하였고 상권은 수원군 전지역뿐만 아니라
인천과 서울을 대상으로 하며 크게 번창하였다.
1914년 2월 25일 조선총독부는 경기도고시 제71호와 시장규칙 제27조에 의해 수원군 성호면에 ‘오
산시장’의 명칭으로 성호면을 시장경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때를 시작으로 현재의 재래시장으로 이
어져 오고 있다. 이 당시 상업거래의 기반이 되는 것은 농업에서 나오는 출산물이 대부분이었는데
1921년에는 수리관개(水利潅漑)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수원군 성호면과 동탄면, 그리고 진위군 북면
일대 2천9백 정(町)의 면적을 수오수리조합이 맡아 답사(踏査)키로 했으며, 1917년 이후 조선수리조
합 발포에 의해 진행중인 조합은 1919년 5월 22일 1백13명의 조합원을 가진 수원군 여화(麗華)수리조
합, 1920년 7월 15일 67명의 조합원을 가진 장지제(長芝堤) 수리조합이 있었다.
지역별 시장 현황에 관한 기록은 1910년대까지도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1920년대 들어 풍부해진
다. 그 중 1921년 12월 말 기준의 『조선의 시장』에는 신기장, 남양장, 발안장만 개설되던 것으로 나타
나는데, 이러한 상황이 192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기에 이 무렵은 화성지역에 향시가 등장한 이래 가
장 적은 수의 시장이 개설된 시기였다, 다만 이들 시장외에 당시 수원군 내에 수원성내장과 수원성외
장, 반월장, 오산장이 더 개설되었고, 각 시장이 상호 연계되며 시장체계를 형성하였다. 13)
1926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보면 당시의 수원 인구는 2만 7182명인데 이 가운데 787명의 일본인
과 56명의 중국인. 1명의 영국인이 있었다. 언뜻 보기엔 800명이 채 안되는 일본인 수는 별 것 아닌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이야말로 수원의 관계(官界), 실업계, 금융계는 물론 상권까지 독접한 실력
자 내지는 세력가들이었다. 자본·기술·인력이 기본인 공업보다는 소자본에 노력만 하면 할 수 있
14)
는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1926년 당시 수원의 산업 관련 통계를 보면 상업(물품판매업, 도매업)이 419개 업소로 가장 많고
매출액도 전체의 80%를 넘는다. 제조업과 인쇄업, 사진업, 전기공급업, 운송취급업, 창고업 등 공업
적 성격의 업체수는 다 합쳐도 총매출이나 업체수의 10% 수준이다. 금전이나 물품대부업, 청부업,
주선업, 대리업, 요리점, 여인숙등의 서비스업 역시 10% 미만의 비중이었다.
오산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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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13) 『화성시사 3』, 23~24쪽.
14) 『화성시사 3』, 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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