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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장의 번성 역시 철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0년 7월8일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이어 1905년
1월 1일 서울~초량간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오산에 시장 영업이 개시되었는데, 경부선이 지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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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수원역, 오산역이 인근에 위치해 있어 물자의 유통이 상당히 원활하였다. 1911년에 간행된 『한국
산업
수산지』에 의하면 그 당시 수원(오산은 수원에 속함)에는 성내장(4일 개시), 성외장(9일 개시), 오산장
(3, 8일 개시), 발안장(5, 10일 개시), 안중장(1, 6일 개시) 등 5개의 장시가 개설돼 있었다. 이 가운데 · 경제
특히 오산장은 물자의 집산이 다대하여 시황이 대단히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14년 2월 25일 / 보건
조선총독부는 경기도고시 제71호와 시장규칙 제27조에 의해 수원군 성호면에 ‘오산시장’의 명칭으로 · 환경위생
성호면을 시장경영자로 지정하였으며 이때를 시작으로 현재의 재래시장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2)
1899년(광무 3년) 3월5일에 간행된 『수원도읍지』를 참고하여 1890년대 오산 인근 지역의 상공업상
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업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시장으로는 1일과 6일에 안중 · 사회복지
장이 수원 남쪽 80리에 위치한 오정면에 섰고, 3일과 8일에 오산장이 수원 남쪽 40리에 위치한 청호
면에 섰으며, 4일과 9일에는 수원 남문 밖에 시장이 섰다. 그리고 5일과 10일에는 수원 남쪽 50리에 / 사법
위치한 공향면에 발안장이 섰다. 이들은 모두 5일을 간격으로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5일장이었던 것 · 치안
이다. 이 때 공업의 발전이 전무할 정도였으므로 주로 농수산물에 의한 생활필수품의 거래에 불과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 소방
한편 을사년에 사창(社倉)이 설치된 이후로는 각종 창고가 폐지되고 환곡을 해당 면에서 하게 하며 · 언론
사수(社首:마을의 책임자)가 모든 입출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곡식의 총계가 4천1백51석 11두 1
승이었는데, 그 중 쌀이 4백44석 8두 7승이고 콩이 7백56석4두 7승이며 보리가 1천6백43석 4두 5승
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 지역의 산업발전이 매우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의 시작 연대는 1910년대였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34년이
지난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이후 강화된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저항이 마침내
1919년 3·1운동으로 정점에 달하게 된다. 그 얼마 후인 1923년말 당시 경기도 주요 상업지의 내·외
국인 상업자수는 다음과 같다. (<표 3>)
표 3. 경기도 주요 상업지 상업자 호구수(단위 : 명)
국적 한국인 제3국인 일본인
지명 호구수 인구 호구수 인구 호구수 인구
경 성 부 17,781 84,454 477 2,478 6,270 26,042
인 천 부 2,990 13,053 193 775 925 4,028
개 성 부 3,402 19,247 90 93 83 338
수 원 부 469 2,332 15 50 163 709
영등포부 299 1,128 4 12 92 370
합계 24,941 120,214 779 3,408 7,533 31,537
출처 : 오산시사, 2009
12) 남경식,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