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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물류 집산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화성의 오래된 장은 경부선 수원역이 생기면서 상권이 역
                  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역전의 상권은 주로 일본인들이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림 3. 1920년대의 수원역


























                                                                                            출처 : 최호진(2017)


                    화성 지역은 과거부터 제조업이 운영되었던 지역이었다. 태안읍, 장안면 어은리, 우정면 호곡리의

                  ‘점말’이라는 지명은 질그릇을 굽는 도공들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매송면의 ‘금곡’, 남양
                  면 북양리의 ‘광산동’, 서신면 백미리의 ‘구리섬’은 금속 광업 중 비철금속 광업과 관련이 있다.                        11)

                    1899년(광무 3) 『수원군읍지』에 보면 수원의 상공업은 몇 개의 사설시장과 25가지의 해산물,소
                  금이 전부였다. 반면에 식량의 총생산량은 4151석(石) 11두(斗) 1승(升)으로 그 가운데 쌀이 444석 8

                  두 7승, 콩이 756석 4두 7승, 보리가 1643석 4두 5승에 달했다. 이처럼 농업은 성했고 상공업은 보잘
                  것 없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 설립된 소위 신식 상업조직인 회사(쉽社)는 102개에 불과했다. 이 가

                  운데 조선인 회사는 21개에 지나지 않았다. 합명회사는 조선인 3개, 일본인 12개, 합자회사 역시 조
                  선인 4개, 일본인 36개, 주식회사도 조선인 14개, 일본인 54개로 비교가 되지않았다. 수권자본금(공

                  칭자본금)에 있어서도 조선인 657만원 , 일본인 964만 원, 불입자본금역시 조선인 228만 원, 일본인
                  471만 원으로 큰 편차가 있었다.

                    한편 오산장은 이미 18세기 기록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즉 1753년 이중환(李重煥 : 1690~?)이
                  쓴 『택리지(択里志)』에는 오산(鰲山)이란 지명이 나오고 오산장(場)이 3일과 8일(당시엔 음력 사용)

                  에 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1792년(정조16년)에 발간된 『화성궐리지』에 실린 지도에 오산장이 등
      오산시사        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63년(철종14년)에 발간된

                  『대동지지』,  1899년 발간된 『수원부읍지』에도 오산장이 언급된다. 오산장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는 정식 시장으로 개설되었다.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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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11)  『화성시사 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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