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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0. 일제 말기의 우리나라 미곡 생산량 추이
구분
경작면적(천, 정보) 수확량(천, 석) 1단당수확량(석)
연도
1937 1,639 26,796 1,635
1938 1,660 24,139 1,454
1939 1,235 14,356 1,163
1940 1,642 22,527 1,311
1941 1,646 24,886 1,512
1942 1,213 15,688 1,293
1943 1,517 18,719 1,234
1944 1,330 16,052 1,219
〈자료 : 수원시사 1986. 1,057쪽〉
한편 일제는 부족한 미곡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에서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절미운동을 벌이
고 미곡공출제를 강력히 시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미곡이 수출이란 명목으로 일본으로 반출
되기 시작하였다. 〈표 11〉에서 보여주듯이 1910년대 중반까지는 1백5만5천 석이었으나, 해가 거듭될
수록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30년대 중반에는 1910년대의 8배가 넘는 8백75만 석 그리고
최대 반출연도인 1937년에는 우리나라 전체 쌀 생산량의 41%인 1천1백만 석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고 한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식량난에 허덕이던 우리 농민은 만주에서 생산된 잡곡 배급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나마도 절대량이 부족하여 콩깻묵이나 소나무의 껍질을 비롯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
이 부지기수였다.
당시의 오산은 수원에 비해 인구나 경제규모면에서 작았지만, 상업이 매우 활발한 고장이며 훗날
화성군의 중심지로 각종물자의 집산(集散)이 빈번해 철도를 이용하는 화물이 많았다. 1936년 한해 오
산의 기차 화물량을 보면 쌀의 경우 탁송(託送)이 1천6백27 톤으로 수원의 1백6백53 톤과 비슷한 수
준으로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이것은 바로 오산지역에서 생산된 많은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탁송으로 생각된다. 또 한편
으로는 오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쌀의 중요한 산지였음을 입증하는데 오산은 낮은 평야지대로 마
을마다 벼를 대단위로 재배하는 몇 개씩의 들판 이름이 있을 정도로 벼농사를 많이 하였고 인근 주변
의 다른 면들도 벼농사를 많이 하여 오산장날이면 벼를 공출하거나 쌀을 판매하기 위하여 수많은 우
마차에 미곡을 싣고 다녔다. 오산 인근에는 우마차들이 쉬는 주막이 생기고 미곡만을 전문으로 취급
오산시사 하는 싸전(미곡시장)과 쌀과 보리를 옮겨 담기 위해 가마니를 팔고 사는 가마니전(가마니, 포대 시장)
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장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 고수막 골목이 생길 정도였는데,
1933년에는 오산곡물상 조합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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