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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서 양잠농가들은 공출에 시달리던 뽕나무를 보기만 하여도 몸서리가 난다고 캐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이런 현상은 평야지대의 부락에서 심했는데 이로 인해 양잠농가와 뽕밭면적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오산지역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광복 직후 양잠산업이 성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
각된다. 또한, 그 후 인조견의 출현으로 견가가 다른 물가에 따르지 못하게 되면서 양잠산업이 완전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5. 광복 후 혼란기의 오산농업
1) 농지개혁과 영농형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나라는 참으로 길고 긴 35년간 일제의 경제침략
마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당시 한국농업은 지주적 토지소유와 영세소작경영, 농업생산기반, 자재
의 부족과 낮은 농업생산력, 경종작물 위주의 자급적 농업생산, 만성적 적자가계를 특징으로 하는 상
태였다. 또한, 직업별 인구에서 농업인구가 전 인구의 72%를 점유하고(1946년 77%), 식량작물을 생
산하는 농업을 주로 하였음에도 대부분의 농가가 적자가계를 면치 못하였다. 매년 봄철에는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를 겪는 농가가 전 농가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실정으로 한국의 경제적 환경은 매우 기
형적인 형태로 농업인구의 대부분이 영세소작농이거나 또는 만주, 일본, 기타 해외의 유민으로 전락
되어 있었다. 이처럼 농업이 기초 식량을 공급할 수 없을 정도로 정체되었던 주원인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광범위하게 확대된 지주적 토지소유였다. 1914년에 논밭을 합한 전체 농경지의 52%에 달하였
던 소작지 비율은 1944년에 62%로 확대되었다. 특히 북한보다는 남한, 그중에서도 전남·북을 비롯
한 전국 각지의 평야지대에서 지주적 토지소유가 번성하면서 남한의 수치만을 집계한 소작지 비율이
65%에 달하였다. 또한, 남한의 소작농 비율은 1944년에 83.0%, 1945년에 83.5%로 해방 당시 농가의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이렇게 농가경제가 적자를 면치 못하였던 것은 경작규모가 영세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소작료 지출이 많다는 점이었다. 소작농의 경우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 이상에 달하였으며 생활비와 공과금 등을 합한 가계지출 총액의 1/3~1/2에 달하였다.
해방 후 소작료 율이 수확량의 1/3 수준으로 인하되었다고 하지만 전 농가의 86%에 달하였던 소작농
들은 여전히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1945년 11월 수
원군 일대에서 농민폭동이 발생하였는데 이 당시 오산지방에도 논을 소작하는 농민이 거의 대부분이
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산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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