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한눈으로 보는 오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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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다수의 무덤이 2세기부터 궐동에서 수청동으로 이어지면서 한눈으로 보는 오산역사
꾸준히 조성되고 있는 양상을 볼 때, 적어도 원삼국시대 후기에
는 대규모 무덤군을 조성 할 정도의 역량을 갖고 있는 고대 정치
체가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삼국시대 오산지역은 한강유역의 지배권에 따라서 백
제, 고구려, 신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
기 온조왕 13년(B.C 6)조에 영역이 북쪽의 패하에서 남으로는
웅천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토대로 가장 먼저 백제의 영역에 속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오산지역 백제의 대표적인 유적은 크게
무덤유적과 취락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무덤은 오산 수청동
유적, 청학동 유적, 금암동 유적 등이 있고 취락유적은 내삼미
동 유적, 외삼미동 유적, 가수동 유적 등이 있다.
먼저 무덤유적을 보면 원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조성되어온 수청
동 유적과 청학동 유적이 있는데 수청동 유적이 가장 대표적이
다. 수청동 유적은 원삼국시대부터 조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 조사된 오산지역 백제의 취락유적은 무덤유적에 비하여
규모가 경기지역에서 조사된 무덤군 중 최대규모로 미조사 지 그 규모가 빈약하여 취락의 중심부가 아직 조사되지 않은
점까지 포함한다면 보다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무덤이 분포하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내삼미동 유적 등이 수청동 무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과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수청동 무
또한 규모의 광대함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청자반구호 등의 중 덤군의 피장자가 거주했던 곳을 이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 청자와 환두대도·찰갑·마구류 등의 철기류, 금제귀걸 한편 우물이 확인된 가수동 유적에서는 백제집터 3동과 구
이·금박구슬·유리구슬 등 장신구류, 금동제 화살통 등 위세품 덩이 20기가 조사되었고 백제 이후의 신라집터와 경작지,
의 성격을 갖고 있는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다만, 인근 수리시설, 저장시설 등도 확인되어 신라 때 생산·저장·
의 화성 요리 유적처럼 최상위 위세품으로 볼 수 있는 금동관모 소비가 어우러진 취락 구조를 파악 할 수 있다. 비록 백제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무덤군의 규모와 귀금속제 장신구와 이후의 취락 양상이지만 백제시대에도 가수동 유적 일원은
철제무기류 등의 다양한 위세품과 중국제 외래문물의 존재는 오 이와 같은 취락구조를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
산지역의 위계가 인근 지역에 비해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된다.
다음으로 내삼미동, 외삼미동, 가수동에서 취락유적이 조사되었 이외에도 필봉 유물산포지, 외삼미동 유물산포지, 양산동
는데 대체로 집터와 (저장)구덩이가 확인되고 가수동 유적에서 유물산포지, 지곶동 유물산포지, 가수동 유물산포지, 원동
는 목제와 돌로 축조된 우물도 확인되었다. 집터는 대체로 평면 유물산포지, 청학동 유물산포지, 누읍동 유물산포지 등에
방형, 장방형, 철자형이고 내부에 쪽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저 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어 추후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장)구덩이는 플라스크형과 통형의 두 가지가 확인된다. 현재까 보다 다양한 삼국시대 유적이 조사될 가능성이 높고 취락의
구조 및 무덤군과 취락의 관계 등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