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한눈으로 보는 오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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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의 강정식 / 한신대학교박물관 연구원
서울과 한강유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에 신라 세력이 진출하기 시작
한 시점은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고구려 공격 및 한강수복(기원후 551
년) 후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553년 이후이다. 신라는 점령
신라 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견고한 석축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를 배치
한다. 그리고 산성을 중심으로 도로가 만들어지며, 무덤과 마을이 등
장한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점령하는 660년 이전까지
경기도 지역에서 백제·고구려와 수차례의 공방이 있었으나, 적어도
· 통일신라
6세기 후반부터는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신라의 마을이 등장하는 것
으로 판단된다.
오산시의 대표적인 관방유적으로는 독산성을 들 수 있는데, 1999년
과 2014년 두 차례의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지표조사 등을 통해 신라~통일신라 유물이 일부 채집되었
유적과
기 때문에 축조 연대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
산시의 지원을 받아 중부고고학연구소와 한신대학교박물관이 2016
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학술조사에서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에 사용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가 출토되어 신라의 한
유물
강유역 진출 시기에 만들어진 석축산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불어
2018년도 발굴조사에서 현재 남아있는 성벽 하부에 고대 성벽이 발견
되었기 때문에 향후 발굴조사가 진행되면 좀 더 정확한 양상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을유적은 가수동, 가장동, 내삼미동, 세교동, 양산동, 탑동에서 확
인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삼국시대(6세기 후반)에서부터 통일신라(남
북국시대)까지 다양한데, 사각형으로 지반을 굴토한 후 한쪽 벽면에
취사 및 난방을 위한 부뚜막과 구들을 설치하였다. 집자리 내부에서
는 목이 긴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뚜껑, 시루 등의 토기류가 주로 출
토되었고, 양산동 유적에서는 건물터 및 주변에서 저울추, 낫, 괭이,
보습 등의 농기구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수동 유적에서는 각종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