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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바로 조파법이었다. 15세기의 한전농법은 1년 1작을 중심으로 한 중등전을 중심으로 중국 화북
농업의 견종법(畎種法)과 연결되는 노동절약적인 조파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 전반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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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1년 2작식 작부체계에서 가장 깊게 편입된 작물은 콩과 팥이었지만 1년 1작식 작부체계와 양맥(兩
산업
麦), 콩, 팥이라는 1년 2작식 작부체계가 병존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의 작부체계는 17세기에 발간
된 농가월령에 의하면 1년 2작 또는 2년 3작식의 작부체계가 발전하였으며, 추맥이 실패했을 때 보리 · 경제
를 얼려서 파종하는 춘화처리법이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 또한, 조나 콩의 경우 파종 및 작무법(作 / 보건
畝法)에서 두둑을 만들지 않고 고랑을 내어 거기에 조, 콩, 들깨, 참깨 등을 파종하기에 이르렀다. · 환경위생
(3) 시비와 농구의 발달 · 사회복지
시비와 농구의 발달을 보면 15세기 비료는 크게 세 유형으로 제1유형은 객토, 녹비, 초목비 등으로
가공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것이었으며, 제2유형은 초회분(草灰糞), 뇨회(尿灰), 버드나무가지로 / 사법
만든 초보적인 외양간거름 등의 가공된 비료였고 제3유형은 종자에 처리하는 누에똥 등의 좁은 범위
에서만 사용된 특수비료들이었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보아 전혀 가공하지 않은 비료들과 약간의 1 · 치안
차 가공을 가한 비료들이 농업생산에 사용되었으나 시비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가 당시의 토지 · 소방
비옥도는 전반적으로 척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초보적인 비료들은 생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 · 언론
하였다. 15세기에는 비옥한 우등지에는 거의 시비를 행하지 않은 채 척박한 땅에서만 여러 종류의 비
료를 한계적으로 시비하였는데 부족한 비료사정 때문에 종자에 대해서만 시비하는 분종법(糞種法) 15)
이 널리 행하여졌다. 그러다가 16세기 전반에 약간의 변화를 보여 추수, 타작 후에 남은 부산물에 봄
과 여름철에 예취하여 쌓아둔 산야잡초를 매일 우마구(牛馬厩)에 3촌(寸)씩 깔아 두었다가 이후 매일
아침에 우마분과 함께 꺼내 적재한 뒤 겨울에 이 구비를 척박한 농지에 시비하는 분수저법(糞収貯法)
을 행하였다. 한편 16세기 말에는 비료의 원재료가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인분뇨, 구비 등과
혼합하여 추비로 제조한 광의의 구비가 사용되었다.
(4) 노동수단의 발달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노동수단으로는 역축(소)으로 두 마리의 소를 한 세트로 작업에 동원할 정
도로 풍부한 축력을 기초로 하였으나, 100가구가 사는 마을에 일을 할 수 있는 소가 몇 마리 되지 않
아 사람이 소 대신 쟁기를 끌 정도로 역축 소유의 불균등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처럼 역축의 사
육과 그에 의존하는 생산력 발달은 축력이용과 구비제조라는 두 측면에서 이 시대 농업의 중요한 요
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이 15세기 농구체계는 다양한 우경구(牛耕具)로 분화 발달되었다. 그 후
16세기 전반에는 먼저 쟁기질을 한 다음 우리의 고유농구인 밀개와 쇠스랑 등으로 마전(摩田)작업을
행하였다. 16세기 말에는 쌍가래, 쇠스랑, 괭이, 호미, 써레, 작도, 도리깨와 다양한 쟁기류와 그 부품
15) 똥 속에 씨를 넣어 밭에 뿌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