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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사용되어 농구체계의 새로운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원래 봉건적인 인적 계층관계가 확립되고 있어서 엄격하게 그 계층제가 존수되었으

                  며, 토지의 지배는 이러한 신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바가 컸다.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질서는 이
                  러한 인적 계층관계의 균형위에서 유지되고 이와 같은 인적 계층관계는 역사의 진전, 농민층의 내적

                  성장에 따라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동요하게 되었다. 국가 권력의 재정기반을 위해서 존재한
                  평민층은 양반층으로 상승하고 국가권력과 양반층에 예속되어 있던 천민층도 이제는 평민층이나 양

                  반층으로 상승해가는 자가 있게 된 것이다. 많은 평민층이 양반층으로 상승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양
                  반층의 농민통제에 대한 권위가 상실되게 마련인데, 조선후기에는 양반은 양반이지만 양반행세를 못

                  하는 양반층이 생기게 되면서 평민이나 천민 중에는 양반층의 권위, 즉 봉건적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경향이 짙어가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농촌사회는 부유층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봉건

                  제를 부정하는 방향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의 맥류재배기술은 견종법이 변함없는 전통농법이었다. 수전종맥법(水田種麦法)은 광무

                  견종법(広畝畎種法)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한전종맥법에 비해 수습(水湿)이 많고 배수가 잘 안되는
                  답에서 5~6척의 광무를 작성하고 무의 넓이에 따라 파종견을 2~3조로 작성하여 조파하였을 가능성

                  이 크다. 조선봉건제 해체의 추진력이 된 경영형 부농의 출현과 광작운동의 생산적 기초는 수전에 있
                  어서의 이앙법 보급과 삼남지방에 있어서의 도맥(稲麦) 2모작이었다.

                    조선후기 한전농법은 하곡인 조, 콩 등은 무상에 농종(밭두둑에 파종)되고 겨울작물인 보리, 밀은
                  밭이랑 간에 밭고랑에 재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후기의 윤작법은 지역성을 표출하면서 종식체계를

                  농속화(農俗化)시켜 나갔는데 삼남의 맥작지대는 동곡(冬穀)과 하곡(夏穀)을 조합한 보리·콩, 방식
                  의 근경작(根耕作)이 지배적으로 되고, 경기 이북의 조 재배지대는 조·맥류, 맥류·콩 등 간종작에

                  의한 일년재종과 이 양방식이 결합된 2년 3작도 지역에 따라 토착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경리(耕犂)에 있어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전리(田犂)는 양우리(兩牛犂)가 지배적이었고 후기에

                  들어 수전농업(水田農業)의 확산으로 단우리(単牛犂)가 점차 양우리(兩牛犂)지대를 잠식해 간 것이
                  라 추정되며 오산지방은 최근 농업기계화가 되기 전까지 소 한 마리가 쟁기를 끌어 논을 가는 전통적

                  인 단우리(単牛犂)의 경운이 주였다.
                    조선 말기 오산지역의 농업실태를 살펴보면, 1899년 당시 오산이 속해있던 수원군의 세대수는 총

                  1만2천5백79호였고, 인구는 4만9천7백8명으로 남자가 2만7천6백32명, 여자가 2만2천76명이었다.
                  수원 성내에 거주하는 호수가 9백56호이며, 성외에 거주하는 호수가 1만1천6백23호였다. 그리고 이

                  때의 총 전답 면적은 3만6천1백36정보였다. 이는 지금의 오산시인 청호역의 전답면적 7결75부6속이
                  포함된 것이었으며 그 후 23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인 1922년의 전답 면적이 3만4천4백3정보로 큰 차
      오산시사
                  이가 없었다.
                    오산은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수도인 한양의 남부 즉 기전(畿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화


      제           성군의 주요 지역으로 제1의 농산지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 후기인 1896년에 지금의 오산이 수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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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청호면으로 편제되었는데, 그 전인 정조 20년(1796년) 청호면에 양향둔(糧餉屯)이라는 이름이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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