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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 1736-1801),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정약종(丁若鍾, 1760-1801),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등이 있다. 이들은 천주교에 대한 공부를 하던 중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신앙공동체는 1784년에 지금의 서울 명동 성당이 있는 자리로 본거지를 옮겨 본격
                  적으로 신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는 한국

                  인들의 자발적 수용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증가되고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 신부들이 들어와 선

                  교를 하게 됨으로써 경기도는 물론 전국 여러 지역까지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유
                  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여겨 박해하기 시작했다. 1785년(정조 9년)

                  의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이나 지속된 박해로 인
                  해 수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1886년 한불통상조약을 계기로 공식적인 박해가 중지되었

                  지만, 을사박해 당시 최초의 천주교 공동체를 이끌던 이벽이 순교를 했고, 경기도 지역에서는 1801년
                  (순조 1년)의 신유박해로 권철신과 정약종 등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1846년(헌종 12년)의 병

                  오박해 때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가 순교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드는 신자들도 많았고, 비밀리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공소들

                  이 만들어졌다. 오산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도 바로 이러한 공소를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했다고 본다.
                    박해가 중지되자 천주교 신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공소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본당이 본격 설

                  립되었다. 경기도에서는 1888년에 왕림 성당이 최초로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왕림 성당은 경기도 일
                  원의 공소들을 대부분 관할하게 되었는데, 1892년에는 당시 수원군(현재의 수원시, 화성시와 오산시

                  및 평택시 일부), 양성군(현재의 안성시 양성면과 공도읍 일대), 용인군(현재의 용인시), 광주군(현재
                  의 광주시) 등에 34의 공소가 있었다. 그 중 당시 수원군 성호면 벌음리(현재의 오산시 벌음동)의 ‘벌

                                                                                                   5)
                  음 공소’와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현재의 오산시 세교동)의 ‘잔다리 공소’도 그 관할 하에 있었다.  일
                  제 강점기인 1922년 당시 이 두 공소의 신자는 각각 63명과 39명으로 이미 100명이 넘는 신자가 현

                  재의 오산 지역에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오산 지역의 신자수가 계속 증가했음을 오산 공소의 설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벌음리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서상길(徐上吉, 세례명 : 우벨토, 오산본

                  당의 초대 총회장 역임)이 1955년에 당시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현 오산동)에 있던 자신의 집을 오산
                                                                                          6)
                  공소로 삼아 분리 신설했고, 1957년에 새로 설립된 발안본당의 소속으로 전환되었다.
                    오산 성당의 설립은 주도한 분은 당시 서정리 본당(현재의 송탄시 서정동 본당)의 제6대 주임신부
                  였던 김덕제 신부(세례명 : 치릴로)였다. 1963년에 서울 교구에서 수원 교구가 분리, 신설되어 경기도

      오산시사        의 대다수 본당이 서울 교구에서 수원 교구로 관할 구역이 변경되었고, 그 당시에는 오산의 공소들을
                  서정리 본당에서 관할했기 때문이다. 새로 설립된 오산 성당에는 서정리 본당으로부터 3개 구역과 5

                                                         7)
                  개 공소에 있던 1,242명의 신자가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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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천주교 수원교구 편,   수원교수 30년사  , 천주교 수원교구청 사무처, 1993, 669-671쪽 참조.
                  6) 오산시사편찬위원회 편,   오산시사  , 3, 오산시사편찬위원회, 2009, 200-201쪽.
    564           7) 오산시사편찬위원회 편,   오산시사  , 3, 오산시사편찬위원회, 2009, 201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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