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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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역, 2009년
다음과 같은 오산역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오산시 원동 당촌에 (당시는 수원군 청호면 당촌 또는 당말)서 태어난 심주택(沈
周擇: 고종4년, 1867년 4월 19일~1945년 1월 23일)이라는 분이 살았다. 호는 오
정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특이한 자질로 선생은 1891년(고종
28년)음력 2월 8일 세자궁 탄일에 치러진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과 차석으로 등과
하였다. 그리고 승차를 거듭하여 1906년 3월 2일 정3품 통정대부자로 승급하고
1907년(광무11년) 4월 6일 시강원 시독관 서주임 3등자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니
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아까운 나이였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조정에 그냥 눌러앉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일본의 내정 간섭과 합방을 위한 수단과 방법
이 대단하였으며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 들어오는 등 국운이 소진할 때여서 공은
미련 없이 약관 25세의 나이에 입궐하여 15년간의 궁중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오
산으로 내려왔다. 1907년은 고종이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파하
여 일본의 침략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
고, 이를 트집 잡아 일본은 왕위를 둘째 아들인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시키려고 하
던 때였다. 하루는 공이 시강원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을 때 고종의 전교가 있어
급히 어전으로 나가 부복하니 고종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옥좌에서 내려와 공
의 두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의(친)왕 척(拓)과 영(친)왕 은(垠)을 잘 부탁하
오.’ 라고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것이 고종과 공의 마지막 대면이고 대화였
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순종에게 양위 되었고, 1919년에는 결국 일인에게 독살
당했다고 전한다. 공이 그간 시강원에서 시독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종의 셋째 아
들 은(垠)인 영왕을 가르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영왕의 나이 5세 때(1900년 ·
광무4년)부터 공이 벼슬을 사직할 때까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유지하여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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