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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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인물인  것이다.





























                                                경기도당굿,  사진출처  문화재청


                    당시,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의  가난한  마을에  사는  무당  이종하  집에는
                  『경기도  창제도청안』1책,  『경기도  재인청  선생안』  1책,  『경기도  창재청』  2책
                  이  있어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재인청이라는  무당의  제도가
                  존속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통적인  세습무  가계  출신인  이용우는  이종하의  아들이고,  일제강점기  현지조사
                  때  일본인  연구자에게  오산12제차  무가를  제공한  이종만의  조카다.  이용우는  서모
                  인  박금초에게  판소리를  사사했고,  부친의  권유로  통도사에서  혼자  소리를  익히기
                  도  하였다는  얘기는  앞에서  언급했다.  그  후  그는  한때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판
                  소리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29세  때  목이  부러져  끝내  판소리를  포기하고
                  무업을  다시  계승했다고  한다.

                    이용우와  같이  경기도당굿을  담당하고  전통적인  세습무가계  화랭이  굿판에서  종합
                  적인  연희를  수행하였다.  그  계원은  “세습무당  당골에  한하며,  전적으로  무악을  연
                  주하는  화랑,  줄타기,  물구나무서기의  등의  곡예를  하면서도  무악을  연주하는  재인
                  가무  예능인이며  무악을  연주하는  광대를  포함한다.”  는  기록으로  미루어  화랑이는

                  집단으로  구성되며,  갖가지  예능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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