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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유망한 민들을 공호(貢戶)로 파악하여 해당지역 군현이 직접 수취하는 이른바 현주지(現住地) 부
적(附籍) 정책을 취하였으나, 원의 고려 침략과 고려정부의 강화도 천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
격적인 대응은 원과의 전쟁이 마무리되는 14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려정부는 지방사회의 피폐
현상을 ‘관다민소(官多民少)’, 즉 군현 수는 많으나 주민이 적은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군현
병합책을 통하여 군현의 수를 줄여나가려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4세기 후반에는 토지나 인구가
적은 영세한 속현이나 부곡지역을 주현에 통폐합시켜 군현의 수를 줄여나가는 현실적인 군현 병합책
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고려시대 주현 130개 중 104개가 조선 초기에 군현으로 유지되었으나, 374개
의 속현은 143개로 축소되었으며, 부곡지역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처럼 고려말 조선초 군현 개편의 대상은 주로 속현과 부곡 지역이었다. 속현과 부곡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 주민의 이탈이 심해 군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현 개편은 속현
과 부곡지역을 주현에 내속시키거나 주현의 직할촌으로 편입시키고, 혹은 몇 개의 속현과 부곡지역
을 합쳐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12세기 초 유망현상은 무인정권이 수립된 12세기 후반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무인정
권기 농민항쟁은 주로 부곡제와 속현지역에서 일어났다. 무인집정 이후에 무인들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들의 반항과 정권을 탈취하려는 무인 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더욱이 하층민인 농
민과 천민의 반란이 계속되고, 백성들이 생활의 궁핍으로 유리 걸식하다가 초적(草賊)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무인집권 이후 민란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농민생활의 빈궁
화에 있었다. 이는 집권 무인들의 토지겸병과 지방관의 수탈 및 농민의식의 성장, 집권 무인들의 신
분문제에서 야기되었다.
수주에서도 다른 어느 지역과 같이 1217년(고종 4)에 민란이 발생하였다. 수주의 속현인 진위현(振
威縣)에서 영동정(令同正) 이장대(李將大)와 직장동정(直長同正) 이당필(李唐必)이 거란유종의 침입
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같은 현의 별장동정(別將同正) 김예(金禮) 등과 반란을 도모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무리를 모아 현령부인(縣令符印)을 탈취하고 창고를 열어 촌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니 당시 굶주린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추종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의병(義兵)’이라
칭하고,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라 자칭하면서 세력을 넓혀 종덕(宗德: 현 화성)·하양(河陽: 현 아
산)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사들을 먹이면서 광주까지 점령하려 하였
다. 이에 고종은 낭장 권득제(權得材)와 산원 김광계(金光啓) 등을 보내어 안찰사 최박(崔博)과 함께
광주·수주 두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시 충청·양주도의 군사
오산시사 를 징발하여 재차 공격, 이당필과 김예를 잡으니 그들의 무리가 흩어져 달아나고, 이장대도 상주(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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州)로 달아났으나 안찰사가 그를 사로잡아 서울로 보내어 모두 처형하였다.
진위현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수원 관내의 송장(松莊) 87호(戶), 부산(釜山)과 청호역(菁好驛)을
제
2 아울러서 59호, 용인현(龍仁縣)·의신현(義信縣) 6호를 떼어서 줄 정도로 땅이 비좁고 백성이 적은
권
98 18) 『高麗史節要』 권15, 고종 4년 정월 및 『高麗史』 권130 열전43 반역4 韓恂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