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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항복하여 적의 형세를 더욱 강성하게 만든 까닭으로 드디어 강등시켜 군(郡)이 되었는데 군 사                                          95
                                                                               7)
                  람들이 재상 김용(金鏞)에게 중한 뇌물을 바치니 다시 부(府)가 되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수                                      역사
                  원군으로의 강등은 홍건적에게 항복한 때문이었다. 이후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좌·우도로 나누                                          /  유적
                  면서 경기도가 도(道)로서 확립될 때 양광도에 속해 있던 남양부는 경기좌도에 새로 편입되었고, 수

                  원부는 1309년(충선왕 1) 이래 양광도에 그대로 내속해서 존속되고 있었다.                                                     · 유물
                    이렇게 수주-수주목-수원부-수원군으로 읍격이 변화하는 동안에도 오산 지역을 비롯한 수원 일

                  대가 경기지역 내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수원 지역은 동화(同和)·장족(長足)·청호역(菁好驛)·
                                                                      8)
                  가천역(嘉川驛)이 위치한 충청주도(忠淸州道)에 속해 있었다.  충청주도는 수주(水州)에서 천안부(天
                  安府)를 지나, 남쪽으로 공주(公州) 방면, 동남쪽으로 청주(淸州) 방면, 서남쪽으로 홍주(洪州: 홍성)
                  방면으로 이어주는 남경 관내에 있으면서 남경과 그 이남을 이어주는 교통로상의 요지였다.

                    고려시대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수주에 속한 오산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가 않다. 다만 조선전
                                                                                     10)
                                                    9)
                  기의 사료에서만 오산의 지명이 나온다.  태종이 수원부의 오산에 머물렀다는  것과, 세종을 태운
                                                               11)
                  대가(大駕)가 수원부 오산원(烏山院) 들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한 “수원(水原)은 속현이 상당히 많
                  아서 땅이 크고, 백성이 많으니,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어찌 유독

                  수원에만 치우쳐서 후하게 하고, 땅이 협착한 옆 고을에는 박하게 하여, 가난한 고을은 더욱 가난하
                  게 만들고, 부유한 고을은 더욱 부유하게 만들겠습니까. 반드시 그 백성이 많아서 사무가 번잡한 폐

                  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부근의 땅으로써 좁고 작은 옆 고을에 떼어 붙이는 것도 또한 옳
                             12)
                  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세종 때의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면, 속현이 많아 땅이 크고 백성들이 많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수주의 영속관계의 변화와 대표 성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 『高麗史』 권56, 志10 지리1 楊廣道 水州 ; 『高麗史節要』 권27, 공민왕 11년 4월.
                  8) 『高麗史』 권82, 志36 兵2 站驛 忠淸州道掌三十四.
                  9)  고려시대에는 예산현에 속한 오산성과 순창군의 별칭인 오산(『高麗史』 권57 志11 地理2 전라도 남원부 순창군), 1260년 차라대가 오산에
                    주둔한 것으로(『高麗史』 권25 世家25 元宗 元年 3월 乙酉) 보이지만, 현 오산지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0) 『太宗實錄』 권31, 태종 16년 2월 癸未.
                  11) 『世宗實錄』 권60, 세종 15년 4월 乙巳.
                  12) 『世宗實錄』 권54, 세종 13년 辛亥 11월 丙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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