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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국가에 대한 공로를 참작하여 관제의 승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김칠·최승규 등의 귀순효
력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의 일로 보인다.
태조의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태조 23년(940)부터였다. 즉 중앙 행
정력이 지방에 침투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예가 국초부터 외읍(外邑)의 사자(使者)로 금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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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有)·조장(租藏)을 파견하였다는 점이다. 그 뜻으로 미루어 볼 때 금유(檢務)는 일반 행정에 관한
사무를 검찰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여겨지며, 조장은 조세를 저장·보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왕실과는 별도로 지방의 유력 세력의 지배하에 거의 반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각 지방에 대해
세공의 액수를 정하고 또 그것을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중앙 지배력이 일정정도 지방에까지
미쳤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광종은 전제정치를 통하여 공신세력을 비롯한 호족세력의 철저한 숙청을 통해 왕권의 신장
을 이루어갔다. 그러나 호족세력의 완전한 근절로 이어지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경종 즉위 후에는 다
시 이들의 반발을 가져와 실질적인 왕권의 강화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지방 행정 조직의 개편
역시 성종 2년(983)의 12목 설치 때부터라 할 것이다. 이 무렵 이후 적어도 지금의 황해도·경기도
지방을 비롯하여 충청도·전라도 지방에는 이미 중앙의 행정력이 상당히 미치기 시작했다.
성종·목종대를 지나 5도(道)·양계(兩界) 등 고려 일대 지방제도의 기본구조를 완성 정비해 낸 국
왕은 현종이다. 특히 1018년(현종 9)의 지방관제 정비 과정에서 새로이 ‘경기(京畿)’라는 지역을 설정
하였다. 경기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우선 경(京)은 왕도를 가리키는 글자이며, 기(畿)는 천자에게
직접 예속되어 있는 4방 천리의 땅을 가리킨다. 이것은 물론 중국의 경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현종이 10도제를 폐하고 지방의 행정체계를 4대도호부·8목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처음으로 경기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지방 관제 정비의 일환으로 개성부를 혁파하고 종래 개성부의
관할 하에 놓여 있던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을 각각 개성현령(開城縣令)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의 관
할로 옮기고 경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경기는 적현과 기현을 합쳐 부른 명칭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성종 2년(983)의 12목 설치 때는 양주(楊州)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그 관할 아래 들
어가게 되었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절도사(節度使) 체제로 개편되는 것을 계기로 수주에는 도단
련사(都團練使)가 설치되었다. 성종이 12목을 절도사로 개편하고 주요 주군에 도단련사·단련사(團
練使)·방어사(防禦使)·자사(刺使) 등을 설치한 것은 거란군의 제1차 침입 직후 지방행정에 군사적
오산시사 인 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단련사는 1005년(목종 8)에 혁파되었으며, 1018년(현종 9)의 지방관제 정비를 통해 수주는 지
방관이 부임하는 지수주사(知水州事)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무렵 목(牧)에서 지주사(知州事)
제
2 로 격하된 양주와 거의 동격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나, 1067년(문종 21) 서경·동경과 더불어 3경의
권
92 3)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外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