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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토기와 고구려계인 격자 암문 토기, 고신라의 인화문토기가 출토되므로 취락의 존속은 백제-고
구려-신라-통일신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성기 백제 단계부터 이곳에서는 많은 수혈 창고를
운영하였지만, 신라는 여기에 더하여 고상창고, 특수 건물, 수리시설 등을 추가하였다. 중앙이 주도
하는 수취 방식의 변화 내지 강화를 엿볼 수 있다.
54)
가장동에서는 통일신라 이후 나말여초기에 걸친 주거지가 8동 확인되었는데 그 분포는 매우 분
산적이다. 5-4지점은 통일신라에서 나말여초기에 이르는 주거지 4동, 수혈유구 15기로 구성된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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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락이 존재하며, 5-5지점에는 통일신라 주거지 1동, 7지점에서 3기가 발견되었다.
백제 취락이 위치한 내삼미동에서는 신라 유적도 소수 발견되었다. 우선 기전문화재연구원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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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역에서는 신라 주거지 2동이 조사되었다. 조사자들은 신라 주거지의 구들도 백제와 동일한 점
이 특이하다고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고 전형적인 신라 주거지이다.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백제
구들은 수혈 내부에 있으며 단이 높다는 점인데 비해 신라 구들은 수혈 바깥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내삼미동에서 발견된 100기에 달하는 수혈 중 65·66·100호 수혈은 신라에 속한다. 보고자는 100
호 수혈을 무덤으로 보고 있으나 매납유적일 가능성도 있다. 이곳에서 무덤은 총 9기가 발견되었는
데 1·3호는 시기 불명, 나머지는 신라에 속하며 5호가 횡혈식석실묘, 나머지는 횡구식석곽묘에 속
한다. 석실묘는 7세기 이전, 우편재한 시상 등을 특징으로 한다.
57)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서 조사한 내삼미동유적에서도 신라토기가 나오는 장타원형이나 장방형
수혈 6기가 발견되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실시한 내삼미동 공유재산 개발부지내 유적에서는 신라 소형 횡구식 석곽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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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발견되었는데 단독묘이면서 유물은 빈약하다. 서해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지점에서 발견된
석실묘 1기는 연도가 남아 있지 않으며 신라인지 불명한 상태이다. 59)
60)
경기문화재연구원이 담당한 가장동유적에서도 신라의 횡혈식석실묘 1기가 발견되었다. 인화문이
시문된 반구호 1점, 호 1점, 대부완 1점, 완 5점 등 소박한 부장양상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오산지역의 신라 고분은 수적으로 많지 않고 분산적이며 위계가 높은 무덤이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그나마 횡혈식석실묘 피장자의 위상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복수의 횡혈식
석실묘가 발견된 예가 없다. 다른 지역에서 횡혈식 석실묘를 중심으로 수혈식이나 횡구식 석곽묘가
주변에 분포하는 양상도 보이지 않는다.
53) Ⅱ-1호 수혈주거지, Ⅱ-1호 고상건물지, Ⅱ-2호 우물에서 작은 편으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Ⅰ지역 수습 유물로도 2점이 더 확인된다.
보고서 고찰편에서는 Ⅰ-1호 수혈에서도 한 점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도면이나 유물 기술 내용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격자 암문이
오산시사
반드시 고구려만의 특징은 아니어서 통일신라 토기 중에도 간혹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가수동 유적의 암문이 만약 고구려 토기와 관
련된다면 이 유적에서 단기간이나마 고구려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54) 서경문화재연구원, 2013, 『오산 가장동유적 –오산 가장2 일반산업단지 조성부지 내-』.
제 55) 1~3호 주거지가 여기에 해당되며 4호 주거지는 그 형태가 통일신라 주거지로 보기 어려워 제외하였다.
2 56) 기전문화재연구원, 2011, 『오산 내삼미동유적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내 2지점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권
57)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2, 『오산 내삼미동 유적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내(1지점)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58) 경기문화재연구원·오산시, 2018, 「오산 내삼미동 공유재산 개발부지내 유적 문화재 시·발굴조사 약보고서(다구역)」.
59) 서해문화재연구원, 2015, 『오산 내삼미동 유적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 275-4번지 내 문화재 시·발굴조사 보고서-』.
88 60) 경기문화재연구원·경기도시공사, 2008, 『오산 가장동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