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제2권
P. 87

한편 가수동 Ⅱ-1호 수혈주거지, Ⅱ-1호 고상건물지, Ⅱ-2호 우물에서는 암문을 시문한 토기가                                         85
                                                                                   35)
                  작은 편으로 출토되었다. 이외에 Ⅰ지역 수습 유물로도 2점이 더 확인된다.  보고서 고찰편에서는                                           역사
                  Ⅰ-1호 수혈에서도 한 점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도면이나 유물 기술 내용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  유적
                  격자 암문이 반드시 고구려만의 특징은 아니어서 통일신라 토기 중에도 간혹 확인되는 경우가 있지

                  만 가수동 유적의 암문이 만약 고구려 토기와 관련된다면 이 유적에서 단기간이나마 고구려 문화가                                            · 유물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제3절    신라


                    551년 백제가 잠시 한강 하류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신라는

                  553년 한강 하류역을 신주로 편제하였고 오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557년에는 신주를 폐지하고 북
                                                     36)
                  한산주로, 568년에는 남천주로 바뀌면서  신라의 영역지배는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통일전쟁이 종
                  료된 후 중부지역에 한산주가 설치되면서 오산도 한산주에 편입되었다.
                    신라가 오산지역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은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강유역을

                  탈취한 신라의 전략은 중요한 거점에 산성을 쌓아서 지역민에 대한 통제와 수취를 강화하고, 고구려
                  와 백제에 군사적으로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양주 대모산성, 하남 이성산성, 서울

                  아차산성과 불암산성, 대모산성, 양천고성, 호암산성, 고양 행주산성, 용인 할미산성, 이천 설봉산성
                  과 설성산성, 여주 파사성 등 수많은 신라의 산성이 축조되었다.

                    오산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관방시설은 독산성이다(그림 7).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벽과 축대는 조
                                                                                                 38)
                                                37)
                  선 후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처음 축조된 시점은 신라로 소급되었다.  이로
                                                                   39)
                  써 그동안 신라 유물이 성 내부에서 자주 채집되던 사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어느 구간이 신라 당시에 축조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성벽의 안에 신라 성벽이 있는지 여부

                  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40)
                    독산성과 관련된 신라 유적으로는 독산성 북편에서 발견된 양산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황구지천에 인접해 있는데 조사구역이 좁아서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었으나, 일반적인 취락
                  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등고선을 따라 2줄의 석열(축대)이 있고 수혈 유구 1기가 발견되었을 뿐이






                  35)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오산 가수동 유적』.
                  36) 양정석, 2017, 「화성시의 신라-통일신라시대 유적과 문화」 『화성시 고고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화성시.
                  37)  노태호, 2018, 「오산 독산성 축대와 건물지의 성격과 양상 -2017년도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오산학연구』Ⅳ, 오산문화원 부설 오산향
                    토문화연구소.
                  38) 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19,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2019년 발굴조사 현장 시민 공개 설명회.
                  39)  김아관·안성현·윤명준·최광훈, 2016, 『오산 독산성 -오산 보적사 요사채 증·개축부지 문화재 시(발굴)굴조사』, 고려문화재연구

                     원·대한불교조계종보적사.
                     이형원·강정식·정지영, 2018, 「오산 독산성 백제·신라 유물의 고고학적 의의」 『오산학연구』Ⅳ, 오산문화원 부설 오산향토문화연구소.
                  40) 한신대학교박물관, 2009, 『오산 양산동 신라 유적』.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