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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활동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양 지점을 잇는 교량은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에 나타나는 洗南橋(洗 87
43)
藍橋)이다. 이 다리는 다듬은 돌을 맞추어서 만든 석교로서 원래 이름은 鳳鶴橋였다. 독산성-양산 역사
동-세남교-안녕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으로는 현재 융건릉 자리인 옛 수원읍성을 거쳐 서울로, / 유적
남으로는 삼남지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44)
45)
한편 독산성의 남편에서 발견된 신라 주거지 2동은 7세기 후반경으로 판단된다. 46) · 유물
독산성을 축조하고 양산동 유적을 운영하던 신라인들이 묻힌 무덤은 독산성 주변에서 발견된다. 우
선 독산성의 남서편 지근 거리에 위치한 지곶동에서 비록 정식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지표조사 과정
에서 발견된 7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되는 석곽묘가 발견되었다. 내부에서 인화문 토기편과 함께 채
집된 청동제 당식과대는 손톱모양과 방형의 청동제 과판이 각기 한 점씩 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47)
표면에 옻칠을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과대를 착장한 인물은 독산성과 관련된 관리로 판단된다.
48)
독산성 동편에서도 판독 불명의 각서가 남아 있는 대부호 1점을 부장한 석곽묘가 발견되었다. 독
산성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수청초등학교 부지 내에서도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석곽
묘 2기는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고 유구의 잔존상태도 좋지 않아서 성격을 알기 어려운데 1호묘는 길
이와 너비가 2:1, 2호묘는 3:1 정도로 세장도가 그리 높지 않은 점, 안벽의 돌은 세워쌓고 측벽의 돌
49)
은 눕혀쌓기 한 점, 유물이 전혀 없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신라 이후로 판단된다. 인접한 세교 2택지
50)
개발지구에서 대파된 석곽묘 안에서 연질 대부완 1점이 발견되었는데 역시 신라 분묘로 이해된다.
비교적 신분이 높은 자의 무덤으로는 가장동에서 발견된 7세기 무렵의 횡혈식석실묘를 들 수 있
51)
다. 전반적으로 신라 무덤은 집중되지 않고 소수가 분산된 모습을 보인다.
비교적 규모가 큰 취락은 발견되었다. 오산 관내는 아니지만 인접한 화성 청계지구에서 통일신라
52)
주거지 49동이 발견된 바 있다. 오산을 대표하는 통일신라 취락인 가수동유적에서는 곡간부의 자
연 수로를 이용하여 밭, 토기제작 시설, 수로와 호안, 창고, 주거지 등이 발견되었다.
가수동유적에서 확인된 다양한 목제품의 존재, 단면 플라스크형 저장고, Ⅵ-11호 수혈 주거지 출
토 석추(저울)의 존재는 이 마을이 일반적인 취락이 아니라 생산과 저장 등의 행위가 이루어지던 특
수한 마을임을 보여준다. Ⅰ-2호 주거지에서 발견된 “干”자 묵서명 토기, Ⅲ지역에서 수습된 “十”
자 묵서명 완, Ⅴ-19호 수혈 출토 “章”자 각서 토기 등의 문자 토기도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백
43) 중앙문화재연구원, 2008, 『화성 안녕리 세람교지』.
44) 정해득, 2016, 「화성지역 조선시대 유적 연구의 현황과 쟁점」 『화성지역 고고연구의 현황과 쟁점』, 화성시.
정해득, 2017, 「화성시의 중세시대 유적과 문화」 『화성시 고고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화성시.
45) 세종문화재연구원, 2016, 『오산시 대로 2-13호선 개설공사부지내 오산 세교동 산41-5번지 유적』.
46) 조사보고서에서는 1, 2, 3호 주거지라고 보고하였으나 3호의 경우 주거지로 보기 어렵고 유물도 신라 토기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제
외하였다.
47) 최정범, 2019, 「오산 지곶동 유물산포지3 수습 당식 대장식구 검토와 경기지역에서의 의미 고찰」, 『야외고고학』36, 한국문화유산협회.
48)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12, 『오산 세교동 유적 -오산 세교동 삼천리 기술연구소내 유적 시·발굴조사-』.
49) 경기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주택공사, 2012, 『오산 세교 택지개발지구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50) 기호문화재연구원, 2011, 「오산 세교2 택지개발사업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5차 지도위원회의 자료」.
51) 경기문화재연구원·경기도시공사, 2008, 『오산 가장동 유적』.
52)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오산 가수동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