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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만 빠져 탈출하였고, 원수 왕빈(王賓)도 적에게 패하여 구원병을 청할 정도로 왜구는 강성하였
다. 이 해에 서주(西州) 비인현(庇仁縣)·수원부·용구에 다시금 왜구들이 침입하였다. 이때에 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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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李富)가 왜구 10여 인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렸다. 왜구를 사로잡은 기사는 이외에도 우왕
10년과 공양왕 3년에도 나타난다. 곧 1384(우왕 10)에는 수원부사 허조(許操)가 공이향(工二鄕: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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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침입한 왜구의 간첩 3명을 생포하였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양광도 관찰사 안경량(安景良)
이 남양(南陽: 화성시)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면서 15명을 생포하였던 것이다. 53)
이처럼 고려의 운명을 재촉할 정도의 피해를 입혔던 왜구는 12회에 걸쳐 수원지역에 침입하였다.
경기지역과 수원일대 역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는데, 경기 서해안지역이 이처럼 왜구의 주된 침
략 대상지였던 것은 서해안 지역의 조운로와도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서해안의 경기만 일대는 호
남 곡창지대에서 산출된 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통과하던 중간지점인 까닭에 왜구침탈
의 중요 목표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왜구 침략에 대응한 경기도민의 항전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왜구의 침구로
인해 군제(軍制)가 변화하여 민의 부담이 가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전에는 군역에서 면제되었
던 계층이 진수군(鎭戍軍)에 편입되었고, 그 부담도 가중되고 있었다. 또한 군액(軍額)의 차출과정에
서 군장(軍將)이나 수령·향리 등의 착취와 수탈이 심하여 민들의 고충이 심화되고, 민에게는 또 다
른 역을 부담시킨 결과가 되었다.
제3절 오산지역의 고려시대 유적
오산 일대에서 고려시대의 유적이 확인된 예는 많지 않은 편이다. 1998년 고려~조선시대의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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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유적이 처음 발굴된 이래, 2003년 가수동 유적 발굴조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발굴조사는 주로 화성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대부분 대규모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진행된 구제 발굴조사이다. 또한 다수의 유구가 집중된 곳은 그 수가 매우 적다. 특히 분묘가 많은 곳
은 10~20기 내외의 규모이나 30기 이상의 유구가 분포되어 있는 유적은 2곳에 불과하다. 현재 고려
시대 유적은 13곳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오산 세교지구(청학동)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에서 주거지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수혈유구, 초석
혹은 적심을 사용한 지상건물지, 도기가마·기와가마·숯가마 등의 생산유구, 산성 봉수 관련 관방
유구, 그리고 토광묘·회곽묘 등의 분묘 유구 등이 확인되고 있다.
오산시사
제 49) 『高麗史』 권133, 列傳46 우왕 4년 3월 .
2 50) 『高麗史』 권133, 列傳46 우왕 4년 3월.
권
51) 『高麗史』 권133, 列傳46 우왕 4년 5월.
52) 『高麗史』 권135, 列傳48 우왕 10년 11월.
53) 『高麗史』 권46, 공양왕 3년 9월 乙酉朔.
104 54)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오산 가수동 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