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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앴다. 태종의 지방 통치 구조 개편은 관제의 개편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때에 수령의 파견이 이
루어졌다. 1403년 6월에 의정부의 찬성사(贊成事) 이하와 삼군총제(三軍摠制)와 경중(京中)의 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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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司) 및 외방(外方)의 수령을 개하(改下)시켰다. 수령을 중앙에서 전국적으로 파견하는 목적에는
당대 집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확산과 동시에 관료 집단 내부의 사적인 조직 강화라는 이중적인 모
습이 나타난다. 실제로 의정부를 주재하던 재상들은 자신들이 천거한 인물을 수령으로 적극 추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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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태종이 왕권 강화라는 차원에서 수령을 직접 지방에 파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그 사실 내
부에는 중앙 집권 세력의 분화라고도 해석할 여지가 많다. 태종과 그의 집권 세력이 중앙의 관직을
재편하고 독점한 이후에 다음 단계로 지방의 요직에까지 진출하고자 했으며, 그 첫 단계가 관찰사 임
명이고, 확대된 것이 수령 파견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수령의 임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관찰사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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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점을 보고하고 견책이 이루어지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었다. 중앙 통치 세력의 소통이라는 새
로운 차원의 정치질서의 재편 결과라고 해석된다. 조선 후기까지 수령의 교체가 잦았던 것도 인사 적
체를 해소하려던 방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태종대 수령의 전국적인 파견도 정치적 고려가 우선
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과거에 합격한 인재를 수령으로 파견하는 사례보다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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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료들이 천거한 자들이 수령으로 파견되던 사례에서도 확인되는 일이다.
제2절 지역 경제와 생활
1. 지역의 농업 환경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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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은 고려 말 북방의 외적 침략기에도 군대가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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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었어도 한양 이남의 요충지임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오산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삼한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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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지역으로 농지가 개발되고 인구가 집결된 곳이었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의 오산지역 부분을 보더라도 붉은 원점의 한양의 아래에 있으며 주요 산맥이 피해가는 평지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그림 2)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오산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오산시사
38) 『태종실록』 권5, 태종 3년 6월 3일(기유).
39) 『태종실록』 권5, 태종 3년 6월 29일(을해).
제 40) 임용한, 「조선초기의 수령제 개혁과 그 운영-태종~세종 연간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2, 경희대 인문학연구소, 1998, 282~286쪽.
2 41)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 2월 9일(을해).
권
42)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6월 8일(경신).
43) 『고려사』 세가 25, 원종 원년 3월 18일.
44) 『세종실록』 권127, 세종 32년 1월 15일(신묘).
120 45) 『가정집(稼亭集)』 권3, 기(記).